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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흑] 새벽의 너와 옅게 물드는 아침

2016. 1. 12. 01:54 | Posted by 에클레아

01.

 물은 색도 없고, 향도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색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봐도 동의할 이야기이다. 그것은 한없이 투명해서, 너머에 있는 것조차 깨끗하게 보이니까. 흙탕물 같은 것은 예외로, 순수하게 물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하지만 향도 없다는 말에는 분명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뭐라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는 가끔씩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향이 느껴지고는 했다. 그것이 주위에 있는 것들과 섞여서 나는 향이라고는 해도, 아예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었다.

 어쨌든, 물이란 그러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대로라면 색도 향도 없으니 바로 앞에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우는 무언가를 감지했다. 조금 전부터 어디선가 묘한 물내음이 나고 있었다. 작은 웅덩이 정도로는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나지 않는다. 여우는 본능적으로 근처에 물이 가득 있는 곳이 있다고 확신했다.

 숲은 굉장히 넓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활동 범위 자체도 넓게 잡지 않고 있었기에, 여우는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여태 모르고 있었다. 그저 날이 맑은 어느 날에, 이 숲이 사실은 넓었다는 것을 문득 떠올리고서 산책이라도 나갈까 하고 정처도 없이 걸어 다녔을 뿐이었다. 단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잠시 다니다가 돌아가려 마음먹고 나온 것이었으나 점점 처음 보는 곳이 나왔고, 그때부터는 이왕 나온 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다니다가, 어느샌가 부터 나기 시작한 희미한 물의 향이 있는 곳으로 목표를 잡은 여우는 얼마 가지 않아서 생소한 장소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것은 이런 숲 속에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커다란 호수였다. 주위에 와서도 연하게나마 물 특유의 향 같은 것이 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계속 나무와 나무의 연속이라고 무심코 생각해버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온통 크고 커다란 나무들로 둘러싸인 한 가운데, 있을 것 같지 않은 장소에 그것은 있었으니까. 여우는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이런 것이 있었지? 여우는 꽤, 라는 말로 얼버무려야 할 만큼의 긴 시간을 이 숲 속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여태 찾지 못했던 것은 역시 일정 범위에서 잘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누구 하나 말해줄 법 한데. 지나가는 말로라도 저번에 이런 곳을 봤는데, 정도의 말은 들었을 법도 한데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조금 더 미리 알았으면 가끔씩은 놀러오기도 했을만했다. 앞으로 와볼까. 여우는 괜찮은 곳을 발견한 것 같아서 이번 산책은 성과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흡족해했다. 오랜만에 멀리까지 나와본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호수 한 가운데로 눈을 돌렸을 때, 여우는 무언가의 위화감을 느꼈다.

 다른 어떤 호수들보다도 아름다운 색을 띄고 있으면서도, 그 바닥은 보이지 않는 깊은 수면. 그 위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수면이 마치 땅이라도 되는 듯이 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누군가는 물 위에 떠있었다. 수면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아무런 표정 없이 가만히 서서 하늘만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것을 보고 여우는 자연스럽게 알았다.

 넓고 넓은 숲 속의 그 호수에는, 정령이 떠있었다.


02.

 그것은 하늘이 비쳐 보이는 호수의 물과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 불 때마다 하늘하늘하게 날리는 옷과 연하늘색 머리카락의 조화는 물론 아름다웠지만, 너무나도 희미한 색이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햇빛에 먹혀 사라질 것 같은 새벽을 닮은 색이었다. 물 위에 있으니 사라진다면 증발하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여우와는 달리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것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물 위에 얌전하게 떠있던 정령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계속 하늘을 보고 있었으면서 눈이 부시지도 않은 모양인지 눈을 찡그리지 조차 않고 태연히 시선을 돌렸다. 여우가 물에 가까이 다가가 닿아서, 물결이 작게 흔들리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인식한 듯 했다. 갑자기 나타난 손님에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음이라기보다는 혼자 하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잔잔한 물결을 그대로 소리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여우…….”

 정령이란 것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었다. 과연 그것을 생물이라고 분류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여우가 실제로 정령을 보는 건 오랜 시간 속에서도 처음이었다. 정령이 있다면 요괴도, 혹은 정말 평범한 동물들도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실제로 요괴나 평범한 동물들은 자주 보는 것이었다.

 여우는 자신이 그냥 여우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짐승도, 요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요괴의 한 종류인 구미호 같은 것도, 전부 여우니까. 자신을 그런 것과 같은 취급을 하는 것은 불쾌하다고 늘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그런 것들과는 달랐다. 여우라 이름 붙은 것은 모두 자신의 아래에 있어 마땅한 것인데 그것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처음 보는 것에게는 더욱.

 “건방진 소리를 하네요, 거기 너.”

 기껏해야 정령 주제에. 여우는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한번쯤 보고 싶었던 존재이긴 하지만 역시 특별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걸로 치자면 자신의 존재만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여우는 스스로 그렇게 여겼다. 정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우가 아닌가요?”
 “비슷한 거지만 그냥 여우는 아닌데요.”
 “그럼 당신은 꼬리 아홉 달린 요물이라도 되는 겁니까?”

 정령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여우 비슷한 무언가지만 평범한 여우는 아니라고 한 것을 바탕으로 다른 가능성 하나를 내어놓았을 뿐이었다. 이 근처에 사는 여우가 아니라면, 가끔씩 나타나는 요물일 것이다. 참으로 간단한 사고였다. 정확히 호수 한가운데, 그가 떠있는 주변으로 조금씩 수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이 찰랑거리는 경계의 땅에 발을 딛고 있던 여우는 대답했다.

 “그런 거랑 비교하지 말아 줄래요?”

 꼬리도 하나고. 꽤 커다란 금색의 꼬리를 보란 듯이 흔들며 여우는 불만을 토했다. 그런 요괴랑 날 비교하면 상처받거든요? 딱 보면 모르는 거예요? 난 당신이 뭔지 알 것 같은데. 정령은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서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평소에 와서 물을 마시고 쪼르르 사라지는 여우들과는 달리 조금 특이한 색이긴 했다. 저렇게까지 밝은 금색의 털은 처음 보는 거니까. 하지만 아는 것이 있다면 모르는 것도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종류의 어떤 것일 거라고, 그는 간단히 결론지었다. 그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할 의지가 없어보였다. 딱히 할 이유가 없으니까.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일관적으로 취하는 정령을 보며 여우는 팔짱을 꼈다. 이 건방진 정령의 입으로 꼭 들어야겠다는 쓸데없는 의지가 가득했다. 우선 여우는 제 이름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키세 료타라고 해요.”

 정령은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당연히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답답한 여우는 제 꼬리를 빙글 돌렸다.





201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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