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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9.04 [먹적]
  2. 2016.09.01 [먹적] 열대야
  3. 2016.02.21 [홍적] 에덴
  4. 2016.01.26 [홍적] Starry night

[먹적]

2016. 9. 4. 23:40 | Posted by 에클레아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다. 돌아가서 편안하게 누워서 어제 사온 신간이나 읽고 싶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마유즈미 치히로는 한껏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런 표정은 여기에는 어울리지 않아요, 마유즈미 선배. 그새 바뀐 표정을 눈치챈 아카시는 아이를 타이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런 건 귀신같이 알아챈단 말이야. 계속 다른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안 건지. 지금 당장 불만을 말하라고 한다면 한참을 말할 수도 있을만큼의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유즈미는 절대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물론 굳이 말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떤 속임수를 쓰는 건지 다 알아차리는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있으니 그것도 무의미하다면 무의미한 짓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를 5가지만 말해 봐."

  "마유즈미 선배가 정말로 듣고 싶으시다면야, 5가지가 아니라 더 많이도 들려드릴 수 있겠지만."


  아카시는 여전히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천천히, 섬세하게. 조금도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아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서 준비해달라고 한 게 누구였더라. 주위에 시계가 없으니 시간을 볼 수도 없어서 그 때부터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럼 빨리 납득시켜."

  "아마도 포기하시는 쪽이 빠르다는 걸 깨닫게 해드리는 쪽이 나을 것 같아서."


  힐끔 바라본 아카시는 여전히 온화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제멋대로인건 똑같군. 마유즈미는 예전의 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누가 둘이라고 했던가. 결국 본질은 같은 것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아카시는 아까보다 조금 떨어져 있었다. 아직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도 다 채우지 않은 채였다. 어디 도망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했는지 뭔지는 모르지만, 굳이 손수 넥타이를 매주겠다고 해놓고서. 보통 다른 사람의 준비를 도와줄 때는 먼저 준비를 끝내놓고 하는 게 아닌가? 마유즈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넥타이."

  "조금 전에 매드렸을 텐데요."

  "나말고, 너 말야."


  마유즈미의 당당한 요구에 아카시는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머리도 좋은 주제에 이런 건 둔하다. 아니면 일부러 둔한 척을 하는 건지.


  "아직 안 맨 걸 지적하고 싶은 거라면, 셔츠를 정리하고 나서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

  "달라니까."


  아마도 둔한 척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전히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아카시에게서 넥타이를 빼앗듯이 받아들고서 마유즈미는 눈만 깜박이고 있는 아카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거 혹시. 아까 자신이 했던 걸 그대로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아카시는 다가온 마유즈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건 제가 할 수 있는데. 아카시는 변명하듯 말했다. 당연히 할 수야 있겠지. 누가 못한다고 생각해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마유즈미는 가볍게 그 말을 무시하고 손을 뻗었다.


  넥타이를 매는 법 정도는 알고 있다. 매일 아침 교복 넥타이를 혼자 맸으니 그 정도는 당연하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매준 건 처음인가.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손을 움직이고 있으니 온갖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아카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다 보인다고 해도 누구처럼 표정만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버릴만한 능력같은 건 없지만. 자, 다 됐으니까 정신차려. 아까 아카시가 정리하다가 만 셔츠를 대충 정리해주고 마유즈미는 손을 뗐다. 아카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까 포기하는 게 빠르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멀뚱하게 서 있으면 가버릴 거니까, 도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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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적] 열대야

2016. 9. 1. 23:20 | Posted by 에클레아






  여름은 싫다. 인간이란 단순해서, 겨울이 되면 또 겨울은 싫다느니, 차라리 여름이 낫다느니 하는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여름이 싫다. 이유야 당연하다. 더워서 기운 빠지는 것도 모자라 잠드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까. 마유즈미 치히로는 한숨을 쉬며 거실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물론 그런 짓을 한다고 해봤자 기분 나쁠 정도로 뜨거운 공기는 여전했다. 창문을 아무리 활짝 열어놔도 바람이 불지 않으니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기분 전환이라는 게 있으니까. 마유즈미는 애써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려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해도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덥다는 거였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방 안의 침대보다는 지금 앉아있는 거실의 쇼파가 시원하다는 것 정도였다.


  "아직 안 자고 있었나요?"


  문 밖에서 뭔가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동거인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혼자 요란한 문소리를 내며 들어온 것은 보기만 해도 더워보이는 옷차림을 한 사람이었다. 불도 안 켜고 뭘 하고 계신 건가요? 늦게 들어올 지도 모르니 먼저 자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거실의 불을 켠 아카시는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눈가를 찌푸리고 있는 마유즈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줬다거나."

  "아냐."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을 텐데."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냐."


  냉정하네요. 아카시는 웃으며 말했다. 마유즈미의 짜증 섞인 얼굴조차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럴 때쯤은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해주면 좋을 것을. 아카시는 여전히 쇼파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마유즈미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저런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할 수 있지. 마유즈미는 아카시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쇼파에 등을 기댔다. 피곤해. 자고싶다. 자고 싶은데 잘 수 없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카시는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건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마유즈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더우면 에어컨을 틀면 해결되는 일이잖아요?"

  "설마 시도 안 해봤겠냐."

  "고장이라도 난 건가요?"


  마유즈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카시는 그것이 무언의 긍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을 되짚어보면 분명 어제까지는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어제는 마유즈미가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오늘 갑자기 그렇게 됐다는 건데. 아카시는 마유즈미가 열어놓은 창문을 힐끔 보았다. 활짝 열려있었으니 지금 상황에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대재앙이네요."

  "그런 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지 마."


  하나도 안 더워보이는 주제에. 너무하네요, 저도 일단은 사람이라 평범하게 덥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렇다고 하면 어떻고, 아니라고 하면 어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대화를 주고 받고서 아카시는 마유즈미에게 조금 다가갔다. 벌어져있던 약간의 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닿은 피부가 그다지 뜨겁다는 감상은 나오지 않았다.


  "더우니까 붙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말을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말은 그러면서 곧바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마유즈미다운 부분이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딱 좋은 자리다. 아카시는 마유즈미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이번에는 더우니까 붙지 말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나저나 정말 기운이 빠지는 날씨다. 아카시는 눈을 살짝 감았다. 늦게까지 바빴으니 집에 들어오면 졸릴만도 했건만 조금도 잠이 들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더워. 마유즈미도 더위에 잠들지 못해서 여기에 있는 거라는 것 정도는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야말로 대재앙이다.


  "자는 거냐?"

  "……설마요."


  이 날씨에 그렇게 금방 잠들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씁쓸하게 웃으며 아카시는 눈만 떠서 마유즈미를 올려다봤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일의 일정에도 지장이 갈 테지. 물론 그런 걱정을 해봤자 이 밤 중에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계속 올려다보는 시선을 눈치챈 마유즈미와 눈이 마주쳐서 아카시는 살짝 웃었다. 뜨거운 공기과 닿은 체온에는 그다지 차이가 없어서, 무엇에 닿아있는지 조차 순간 잊어버릴 정도다. 꼭 원래부터 하나인 것 같이, 그런 기분이 들 정도로.


  내일은 에어컨부터 고치도록 하고…….


  잠들지 못하는 밤. 잠들지 못한 것은 더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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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적] 에덴

2016. 2. 21. 22:55 | Posted by 에클레아



 겨울은, 이별의 계절이다.

 1년의 끝. 봄은 시작과 만남의 계절이며, 반대로 겨울은 봄에 만난 것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계절. 누가 그런 걸 정했는지 같은 걸 따져보는 건 말 그대로 시간낭비지만, 의문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1년의 시작도 끝도 겨울인데. 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아마도 추위의 끝에서 졸업식을 하고, 포근함의 시작에서 입학식을 하기 때문이겠지. 만약에 그 반대였더라면 봄이 마지막 계절이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겨울, 1년의 끝자락에서, 아카시 세이쥬로는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윈터컵이 끝나고 그리 오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라쿠잔 농구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전부 도움이 되는가 하면, 솔직히 말해서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실제로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건 그 많은 인원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시합의 결과. 그리고 시합의 결과를 결정짓는 것은 그 극소수의 인원. 특히 올해의 은퇴에, 큰 전력 손실 등의 문제가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한 명뿐이라면 대체할 사람을 구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그저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당장 큰 문제가 생길 것도 없다. 그럼에도 아카시는 이 순간이 썩 기분 좋지는 않았다.

 매년 겪어 왔던 연례행사이고, 떠나보내는 입장도 떠나는 입장도 되어보았다. 떠나는 입장에서는 크게 아쉽지 않았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역시 떠나보내는 입장에 서는 것은, 몇 번을 지나와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그 중에서, 같은 코트에서 뛰어본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더더욱.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떠나가는 그들은, 미련도 아쉬움도 표하지 않았다. 이건 어쩔 수 없으며,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표하지 못한 것들을 그러모아 끌어안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아카시는 모두가 떠나는 마지막까지 체육관에 남아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을 모았다. 정확히는 아카시 세이쥬로의 역할이 아니라, 제 직위의 역할이었다. 주장이란 그런 자리이다. 과거에 누군가가 알려주었다. 그것만을 알려준 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간 사람이.

 아카시는 마지막 정리를 끝낸 후에 체육관 문을 닫았다. 떠나는 사람이 있다면 만나는 사람도 있다. 찾아오는 많은 사람을 잃은 장소는 곧 옛 모습을 찾는다. 봄이 오면 또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은퇴식이란 것이 부원으로서의 마지막 행사라고는 해도, 오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되는 것도 없다. 수험 때문에 바쁘거나, 다른 약속이 있는데도 그것을 제쳐놓고 오라고 할 만큼 거창한 것도 아니다. 그만큼 애착이 있는 사람도 없겠지만.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아카시는 돌아가는 길에 오늘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낼 메일을 작성했다.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쓸데없는 내용은 조금도 들어가 있지 않는 간결한 내용이었다. 더 무언가를 덧붙여 봤자 읽는 입장에서도 귀찮아질 뿐이다. 본문 작성을 마친 아카시는 주소록에서 몇 명의 이름을 찾았다. 천천히 내리며 찾던 도중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눌러보았지만, 오래도록 아무런 연락 기록도 없는 이름이었다. 여태까지 쌓인 기록들이 지워지고 지워질 동안에도, 아직까지 연락처 자체가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잠시 저장되어 있는 이름을 보고 있으니 꽤 오래도록 본 적이 없는데도 금방 기억이 났다. 기억 속의 얼굴이 조금 흐릿해져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사진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흐릿한 부분을 스스로 채워 넣는 것도 불가능했다. 중학교 때의 부실에 가면 단체 사진이라도 남아 있을까. 막연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발견한 이름 몇 글자가 제게 향수라도 불러일으킨 것인지.

 하지만 지금 찾는 주소는 이 사람이 아니다. 아카시는 이제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을 것을 아는 주소를 화면에서 지웠다. 또 언젠가 주소록에서 발견하게 되면 그 때 다시 떠올리게 되겠지. 오늘처럼. 잠시 잊고 있었던 바람이 조금 차가웠다. 메일 전송을 끝낸 아카시는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낸 교정을 벗어났다.


 아카시 세이쥬로가 도쿄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3달 뒤의 일이었다.

 테이코 중학교는 본가에서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위치에 있었다. 아카시는 기차에서 갑자기 정한 행선지에서 발걸음을 멈춰 섰다. 아까 주소록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굳이 올 일은 없었을 텐데. 1년 만에 방문한 모교는 우연히도 졸업식을 맞이한 것 같았다. 졸업이라. 그러고 보니 오늘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게 한 사람도 여기서 졸업식 날에 마지막으로 보고, 그 뒤로는 연락 한 번 닿지 않았지. 아카시는 교문 앞에서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예전에는 저 어딘가에 있었을 테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자신의 졸업식보다도 더.

 어디에서 무엇을 했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전부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표정만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의 표정은 못 봤을 테니까 당연하지만, 그 때 자신의 표정을 본 그 사람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가. 이상했다. 평소같은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졸업 축하드려요, 그런 뻔한 말을 건넸다는 건 기억이 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말이었던 걸까. 조금의 힌트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불과 몇 년 전의 추억에 젖어 있었더니 운동장의 사람들은 꽤 줄어있었다. 학교에서의 사진은 남길 만큼 남기고 떠난 것이겠지.  그 때 나도 사진을 하나 찍어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와서 말해도 늦은 생각을 하며 아카시는 발걸음을 돌렸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어느새 근처에 누군가가 서있었다.

 그 사람도 졸업식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 찾고 있는 건가. 아는 사람이 졸업이라도 한 걸까. 이제 슬슬 본가로 가지 않으면 어디쯤이냐는 연락이 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움직이던 아카시는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것 같은 뒷모습인데? 하지만 아는 사람이 이 시간에 여기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카시는 애써 묘한 기분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냥 조금 더 앞으로 걸어가서, 지나가는 척 얼굴을 확인하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생각했더니 비슷한 사람을 보고 착각이라도 한 것이겠지. 자신의 기억보다 더 크고, 무엇보다도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잠이 덜 깨서 사람을 잘못 보고 있거나.

 그게 가장 현실성이 있는 일인데도 어쩐지 불안했다. 다시 봐도 누군가를 닮은 뒷모습이었다. 지금 보이는 건 뒷모습뿐이지만 그랬다.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을 테지만, 그래도 뭔가 하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다. 놓치다니, 무엇을? 지금의 상황이 굉장히 현실감 없게 다가왔다. 어느새 약간의 다급함도 섞여버렸다는 것을 아카시는 눈치 채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을, 그 때의 사람들을 이미 잊어버린 건 아닐까. 사실은 그냥 혼자의 착각일 가능성이 가장 컸지만. 만약에 정말 잊어버린 거라면. 아카시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대답을 듣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걱정을 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와버린 말을 인식했을 때는 조금 늦은 뒤였다.

 "……니지무라 선배?"

 자신은 한 번도, 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본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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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적] Starry night

2016. 1. 26. 00:03 | Posted by 에클레아

*보쿠시->니지무라의 호칭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름으로 설정해두고 있습니다. 기본 반말.






 "안녕, 슈조."

 피곤하다. 집에 돌아가면 바로 씻고 자야지. 솔직히 졸려서 반쯤 나간 정신을 겨우 붙잡아서 집에 들어온 니지무라는 가방을 떨어뜨렸다. 툭, 하며 적당히 묵직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집 안에 있던 누군가가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인사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한밤중에 남자 중학생의 목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니지무라 슈조는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가족이 없는 것도, 외국에 나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정상 그랬다. 중학생이라고는 해도 운동부. 혼자 살면서 크게 위험해본 적도, 위험과 맞닥뜨린 적도 한 번도 없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니지무라는 다시 문을 열고 뛰쳐나간다는 선택지 대신에 찬찬히 살펴보는 것을 택했다. 단순한 도둑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부분이 많았다. 집 주인이 돌아왔는데 태연하게 움직이지도 않고 있다는 점이나, 그걸로도 모자라 인사를 건네고 있다는 점이나, 니지무라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무엇보다도, 묘하게 낯익은 목소리였다. 분명 오늘 낮에도 듣고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굉장히 익숙한.

 니지무라는 그 자리 그대로 서서 벽을 더듬었다. 불을 켜는 스위치가 있었는데. 분명 이 근처 어딘가에. 이쯤이었던가. 조금 당황해서인지 빨리 손에 닿지 않았다. 눈은 자신에게 인사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달칵. 그렇게 크지는 않은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그새 어두운 것에 조금 적응되어 있던 탓에 눈이 부셨다.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니지무라는 곧 제 침대에 있는 사람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혼자인줄 알았더니 두 명이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은 아닌가. 여차하면 싸울 준비도 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럴 일은 없었지만.

 "아…… 아카시?"

 심지어 아는 사람이었다. 어쩐지 목소리가 낯익다 했더니. 그렇다고는 해도 굉장히 의외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여길 들어온 거지? 니지무라는 누군가에게 제 집의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알려줄 일도, 이유도 없고. 그런데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기 집 마냥 들어와 있다니. 어디의 스토커인가. 아니, 그럴 리는 없는데. 저 아카시가. 혹시 진짜 아카시가 아닌가? 닮은 사람인가? 그보다 아카시가 두 명인데? 아까부터 잠이 온다 싶더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현관에서 쓰러져 잠이라도 든 걸까. 니지무라는 지금 이것이 꿈인지 아닌지조차 헷갈렸다. 진심으로.

 "이렇게 늦게 들어올 줄이야. 한참 기다렸어."
 "아카시? 진짜 아카시냐?"

 니지무라는 다시 똑같은 이름을 입에 담았다. 추측으로 물어본 거지만 만약에 그게 정답이라고 한다면. 니지무라의 기억 속의 아카시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존댓말도 꼬박꼬박하고, 작고 귀여웠는데? 뭔가 더더욱 알 수 없게 된 기분이었다. 밤에 본 건 처음이긴 하지만, 보통 사람이 낮이랑 밤에 이렇게 다른 사람처럼 바뀌나? 혼란스러워하는 니지무라와 달리 아카시라고 불린 쪽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네가 아는 아카시는 이쪽이지만."
 "그럼 너는? 사실 쌍둥이였다거나, 뭐 그런 거?"
 "그것도 정답."

 계속 물어 보길래 그것도 말하려고 했는데 수고를 덜었어. 아카시는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웃는 표정은 기억 속의 아카시와 똑같았다. 맞다고는 했지만 영 의심 간다는 눈으로 아카시를 살펴보았다. 평소의 이미지와 완전 다른 아카시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고, 다른 한 명이 그 아카시 품에 안겨 있었다. 그리고 자는 것처럼 조용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쌍둥이가 맞다고 했던가. 아카시를 알게 된지 꽤 지났음에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물론 눈앞의 광경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두 명이 있으니까.

 "아까 말했듯이 네가 아는 아카시는 이쪽이니까. 일단 나는 세이쥬로라고 해둘까. 이쪽의 이름이긴 하지만 호칭이 섞이면 부르기 힘들잖아?"

 이쪽을 아카시라고 부르는 모양이니. 세이쥬로는 아카시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니지무라는 여전히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표정이었다. 집 안에 있던 불청객이 제 후배라는 것을 깨닫고 경계는 조금 푼 모양이었다. 어떻게 들어와 있는지는 일단 그 다음으로 치고. 니지무라는 멍하니 서 있다가 그제야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니지무라가 가까이 다가오자 세이쥬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품에 안고 있던 아카시를 넘겨주었다. 말이 넘겨 주었다지 거의 떠넘기다시피 하는 행동이었다. 니지무라는 잠시 당황했지만 반사적으로 아카시를 안아들었다. 그대로 놓쳤다가 바닥에 떨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넘어온 아카시는, 잘 자고 있다고 하기엔 그다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간단하게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

 그렇게 말하는 세이쥬로의 뒤에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날개가 있었다. 마치 박쥐의 그것처럼 생긴, 새까만 색의.

 "이걸 보면 알겠지만 아카시와 나는 사람이 아냐. 이쪽이 사람인 척 하고 있었지만. 본론 전에 질문. 혹시 몽마라고 들어봤어? 이야기든 뭐든. 아, 우리의 경우 조금 일반적이진 않은데 서큐버스라고도 하고."
 "서큐…… 뭐?"
 "서큐버스. 그쪽 호칭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똑같은 말이니 상관없나. 세이쥬로는 다시 날개를 접었다. 조금 전에 펼쳐져 있을 때는 꽤 커보였는데, 접으니 조그만한 크기로 보였다. 마음대로 펼쳤다 접었다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서큐버스는 일반적으로 여자인데, 우리는 조금 돌연변이 같은 거라서. 그렇다고 해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었지. 감히 우리를 건드릴 녀석들도 없었고. 아까 말한 대로 사람은 아니라서 특정한 걸 먹으면서 살고 있는데, 아카시는 그게 꽤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구조적으로 그게 없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니지무라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것이 현실이라는 기대는 포기하기로 했다. 판타지 소설 같은 걸 즐겨보는 편도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꿈을. 세이쥬로는 나름대로 진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버렸거든."

 그걸 왜 나한테? 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까지 차올랐지만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사실은 사람이 아니었든 간에, 여태까지 귀여워했던 후배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꿈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내키지는 않지만 먹고 살기 위해 힘은 내던 아카시가 더 이상은 못하겠으니 관두겠다고 선언해 버린 게 얼마 전의 일. 그리고 당연하게도, 필요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니 버티다 기절해버린 게 오늘 저녁의 일."

전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 이야기였다.




대운동회 신간 샘플. 정확히는 작년 여름에 쓴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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