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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적] 연인으로 삼으려고~

2016. 1. 12. 02:15 | Posted by 에클레아

 아카시 세이쥬로. 용모 단정, 성적 최상위권, 1학년이면서 학생회장과 농구부 주장을 겸하고 있음. 유서 깊은 명문가의 유일한 후계자. 본가는 도쿄. 교토에는 분가가 있다고 한다. 백마도 기르고 있다나. 여학생들에게는 아카시 님으로 불리고 있으며, 친위대도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정보 또한 존재. 누가 봐도 요만큼의 흠집도 없을 것 같은 이 녀석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무슨 문제냐고 한다면, 아마도 정신적인 문제겠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기준은 나.

 나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산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꽤 여러 타입의 인간을 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녀석은 특별하다. 좋은 뜻이 아니다. 특별할 만큼 이상하다는 뜻이다. 키 작은 걸 남 탓으로 돌리고 싶은 건지 머리가 높다며 멋대로 앞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질 않나, 경기에서 지면 눈알을 뽑아준다느니 하질 않나. 웃기지마라. 네 녀석 눈알 같은 건 줘도 안 가져. 받아봤자 쓰레기밖에 더 되겠냐고. 아니, 그 이전에 기분 나쁘니까.

 어쨌든, 그런 아카시가 이상 징후를 보인 것은 윈터컵 결승전 도중의 일이었다. 원래 저런 성격이겠거니 하고 이해해,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면 되니까. 그것뿐이었는데. 아카시가 언젠가 말했던 적이 있었던가. 좋아하는 음식이 탕두부라고 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굉장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멘탈 상태 또한. 네 녀석의 머리는 두부로 이루어져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경기는 끝나고 나서 지지고 볶든 하라는 의미로 한 번 쏘아붙여줬을 뿐이다. 할 말은 하는 나, 역시 멋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자면 문제는 아마도 그것이었던 것 같다. 사실은 어떤 다른 세계의 오드아이인 레드 드래곤인데 차원을 넘어온 충격으로 여태 그 모든 것을 잊고 있다가 한꺼번에 모든 기억이 돌아온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그 녀석은, 그 시점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단순히 인생 첫 패배로 인한 충격에서 오는 심리적 변화는 아니었다. 정말로, 그건 다른 사람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말할 때의 단어 선택이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그래서, 나는 물었다. 윈터컵이 끝나고 나서 교토에 돌아가기 전이었다. 너 역시 예전의 그 느낌이 아닌데. 아카시는 평생 한 번도 지어본 적 없었을 것만 같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혹시 그걸 아는가 모르겠다. 굳이 말해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기에 가만히 있었더니 아카시는 무언가를 추억하듯 대답했다. 동생 같은 아이가 하나 있었거든요. 질문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싶은 뜬금없는 대답이었지만, 다년간의 덕질로 인한 내 직감은 그 한 마디로 눈치 채버린 것이다. 이것은 설마 또 하나의 나.

 그렇다. 정말로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명이었다.

 충격적이군. 그리고 사실은 이쪽이 진짜 아카시라는 것도. 처음 본 그 녀석이 가짜 아카시라니. 여태 내가 알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 세계였다는 것인가. 이건 마치 사실 링고땅이 여동생이 아니라 누님이었다 수준의 충격적인 이야기라고. 물론 내 링고땅이 그럴 리가 없지만. 이래서 3차원이란.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한쪽이 진짜고, 한쪽이 가짜라고 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아는 아카시는 네가 아니야. 아카시는 그런가요, 하고 쓰게 웃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눈치 챌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카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을 선택한 건 제가 아니었죠. 내가 이 녀석에게 다시 존댓말을 듣는 날이 올 거라고는. 애초에 그런 걸 바란 적도 없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런 녀석이었다.

 난 일이 있어서 너희보다 늦게 교토에 갈 거니까, 알아둬. 감독에게는 말해뒀다. 네, 이미 들었어요. 그럼 나중에. 다른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는데도 아카시에게서 자꾸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긴, 그걸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쪽이 이상한건가. 애초에 더 이상 저 녀석이랑 관계될 일도 없을 테니 이대로 잊어버리는 게 좋을지도. 졸업하고 나면 더 이상 마주칠 필요도 없으니까. 아카시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느낌이다보니 사회에 나가서도 마주칠 것 같진 않았다. 그러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다른 사람으로 바뀐 시점에서 얄팍한 인연도 끝이다.

 ……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래도 솔직히 역시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그 녀석이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한 것이 마치 내 탓 같은. 그래, 딱 그거다. 생각하면 할수록 찝찝하다. 나는 할 말을 했을 뿐인데. 나는 너한테 불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대체 뭔데. 마치 내가 말 한 번 잘못해서 한 사람 인생을 망쳐놓은 것만 같잖아. 난 평범한 독서 애호가라니까. 그럴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고. 그 전에 그 녀석이 두 명이라는 것따위,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딘가의 흔한 라노베 주인공 같은 설정의 인간이라고 생각해봤던 적은 있지만 설마 이중인격 속성까지 부여되어 있을 줄이야. 상상 이상의 인간이다. 어쩌면 정말로 이세계의 드래곤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인간계에 심심풀이로 내려온 마왕일지도. 아직도 본성을 숨기고 있는 건가, 아카시 세이쥬로.

 그 녀석은 내게 도쿄에서 무슨 다른 할 일이 있는 같은 건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서 그대로 자리를 떠나갔다. 궁금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것마저 이미 알고 있는 건지는. 아카시라면 분명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긴 하다. 물론 물어봤어도 대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저런 녀석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 나머지 무관의 어쩌고 하는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그 녀석들은 내 취향 같은 건 요만큼도 존중해줄 것 같지 않으니. 아카시는 그 중에서는 조금 나은 편인가. 그래봐야 현실에 충실한 녀석이었지만. 다른 의미로도 아카시를 비롯한 나머지와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그럼 나도 슬슬 자리를 떠볼까. 여기까지 더 챙겨온 옷이라고는 교복 밖에 없었지만 학교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혀있는 져지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농구를 해서 다행이야, 나, 같은 말은 하지 않겠지만, 타이밍이 좋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덕분에 도쿄까지는 그냥 왔으니까 말이야.

 역시 연말이라면 이벤트다. 그것도 도쿄에서 열리는. 나는 이 날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건 중요하다. 매우 중요. 미리 숙소를 잡아두어서 다행이다. 도쿄에 연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아카시 녀석의 본가가 도쿄에 있다고 했던가. 여기까지 왔으면서 본가에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가는 건가. 져서 가기 싫은 걸지도.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나는 오늘 푹 쉬고 나서 내일 전장에 뛰어들어야 하니까.


 이후의 일을 생각하자면,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이 비틀릴 일이 생기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따위의 묘사가 나왔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내 인생은 라노베 속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걸 추억하는 입장에서야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나, 평범한 한 명의 고등학생인 마유즈미 치히로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뿐이다.

 그 길로 곧장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들어가서, 그대로 푹 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각오를 다졌다. 목록은 이미 다 정리해서 적어두었다. 이 정도의 준비도 없이 여기에 올 리가 없지. 교복 차림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겨울의 바깥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12월 말이니 안 차가우면 이상하긴 했다. 그렇다면 그건 세상이 망할 징조다. 아무튼, 새벽의 거리는 조용했고, 바람은 차갑게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찍 나왔으니 그 동안의 기다림이 지루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시간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거의 모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이 정도의 긴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는 것 정도는 전혀 예상 밖의 문제가 아니었으니 패스. 교복이라고 해도 이쪽을 신경 쓰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오히려 주위의 코스프레가 더 눈에 띄었으니 그것도 패스. 단지, 기다림의 도중에 어디서 본 얼굴과 마주친 기분이 들었던 것밖에 없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했던 적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기억에 남았던.

 그래, 그러니까 나는 저 얼굴을 어디서 봤냐면, 토오에 저렇게 생긴 녀석이 하나 있었지 않았던가. 툭하면 사과하던…… 아니, 아니다. 토오의 레귤러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굉장한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아까 그 얼굴과 다시 눈이 마주쳤나 싶었더니, 엄청난 기세의 죄송하다는 외침이 돌아온 것이다.

 존잘님 부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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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2. 02:11 | Posted by 에클레아

 그는 이따금씩 옛날이야기 같은 것을 해주고는 했다. 그의 인형은 그가 해주는 이야기들에 흥미가 있었다. 여태까지 보거나 대화할 수 있는 인간이 그 한 명 뿐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식은 모두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위한 존재이며, 어떠한 존재인지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었지만 그것만은 확실한 진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인형이라는 만들어진 존재니까.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냐는 건 굳이 고민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 사람 하나와 인형 하나는 제작자, 혹은 주인님과 인형이라는 관계일 테지만 그는 주인님이라고 부를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저 활짝 웃으며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인형은 그러겠다고 했다. 호칭은 아무래도 좋으며, 제작자의 말에 거스를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에 의한 창조물이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제공받을 수 없는 한낱 물건에 불과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인형은 자신의 지정석 같은 곳에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집은 그의 작업 공간 외에는 깔끔한 편이었다.
이번에 그가 해준 이야기는 먼 옛날의 신화의 한 종류였다. 아름다운 여자를 조각한 한 남자는 그것을 사랑하게 되었고, 신에게 빈 결과 결국에는 조각상이 사람으로 변했다는,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인형은 곧 그 생각을 정정했다. 그런 비슷한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존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먼 옛날에도 료타 같은 사람이 있었구나.”

 인형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였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사람처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신에게 빌었다, 같은 건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여태껏 가장 곁에서 그를 보아온 바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은 사람이니까요.”
 “나는 사람이 아니니까.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해.”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 걱정 말아요.”

 나는 키세 료타라고 해요! 예전에, 들뜬 목소리로 그렇게 고하던 그는 인형에게 곧바로 아카시 세이쥬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만들기도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인형은 제 이름을 기억했다. 갓 깨어났다고는 해도 기초적인 약간의 지식은 가지고 있던 인형에게 그리 어려운 이름은 아니었다. 게다가 제 외형과도 잘 맞는 이름이었다. 키세의 취향이었는지, 그저 이 색이 구하기가 쉬워서였는지,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모두 붉은색이었다. 어쩌면 이름과 일부러 맞춘 것일 수도 있었다. 이름은 전부터 지어뒀다고 그가 말했으니.

 아카시는 키세 옆에 있으면 작은 체구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평범한, 혹은 조금 작은 남자 정도의 크기는 되지 않겠냐고 키세는 말했다. 아카시에겐 비교할 대상이 키세 외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정도로 인지했다. 인형이란 건 원래 사람 크기인 것인가. 무엇보다도 크기는 지내는 데에 크게 상관이 없기도 했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의 크기이기에 생활하기는 편했다.

 키세는 그렇게 자주 외출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예 집에만 박혀 있는 타입도 아니었다. 물론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주로 늦은 밤인 시간이었다. 빨리 돌아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굉장히 오래 걸리는 날도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키세는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아카싯치를 위한 재료를 사왔다고 매 번 말했다. 그래서 아카시는 그가 돌아오면 오늘은 뭘 가지고 왔냐고 물었다. 그리고 정말 외출했다 오는 날이면 아카시에게 무언가를 추가해주곤 했다. 놀라울 만큼 인간과 비슷하지만 인간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다. 가령, 눈 색을 바꾼다거나 하는 것조차. 눈을 갈아 끼우면 되는 거니 나중에 그 색이 질리면 나한테 말해줘요, 하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아카시는 지금의 자신의 외형에 아무런 불만도 없었기에 알았다고만 했다. 키세는 늘 무언가 해주고 싶어했다. 제작사로서의 애정 같은 건가. 아카시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카시에게 있어선 평생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였다.



 아카시는 단 한 번도 바깥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가끔 조그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것과, 티비에 나오는 것이 아카시가 아는 바깥 세계의 전부였다. 키세는 딱히 외출하고 난 뒤의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고, 아카시도 그것을 크게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화할 상대라면 키세가 있었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인간이 아닌 이상 한 곳에만 있는다고 해서 큰 불편을 느낄 것도 없었다. 그리 좁지는 않은 집안만이 아카시가 아는 모든 세계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아카시가 처음으로 바깥에 호기심을 느꼈던 것은 키세의 외출이 조금 잦아졌을 때였다.

 “요즘 자주 나가는 것 같네.”
 “아, 일이 있어서요. 조금…….”
 “바깥엔 재밌는 거라도 있어?”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말하고도 아카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이렇게 바깥에 대해 생각했었던가? 곧 아카시는 키세가 바깥에서 흥미 있는 것을 발견했기에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조금 전의 자신을 추측했다.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키세밖에 없는 만큼, 키세가 없으면 자신은 확실히 외로움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었다. 가끔 나가는 건, 보통 아카시가 잠이 들 시간에 나갔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었다. 키세가 들어오면 인기척에 자다가도 잠이 깨긴 했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키세는 최대한 자신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조심조심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최근에는 이상하게도, 나가는 시간이 완전히 달라졌다. 잠에서 깨면 집에 키세가 없었다. 그건 아카시에게 있어서 굉장히 낯선 환경이었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인형은 어떻게 보자면 아이와도 비슷했고, 그는 부모 같은 존재일 수도 있었기에.

 “재밌는 게 있어서 나가는 건 아닌데요…….”

 어디까지나 중요한 일 때문이라고 키세는 답했다. 그 중요한 일이 뭔지는 굳이 알려주지 않았다. 아카시는 키세를 빤히 올려다봤다. 눈에는 약간의 불만이 들어있었다.

 “나가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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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2. 01:54 | Posted by 에클레아

01.

 물은 색도 없고, 향도 없다고 누군가 말했다. 색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가 봐도 동의할 이야기이다. 그것은 한없이 투명해서, 너머에 있는 것조차 깨끗하게 보이니까. 흙탕물 같은 것은 예외로, 순수하게 물 자체만 놓고 보았을 때. 하지만 향도 없다는 말에는 분명 고개를 갸웃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뭐라 말로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는 가끔씩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향이 느껴지고는 했다. 그것이 주위에 있는 것들과 섞여서 나는 향이라고는 해도, 아예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있었다.

 어쨌든, 물이란 그러한 것으로, 흔히 말하는 대로라면 색도 향도 없으니 바로 앞에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우는 무언가를 감지했다. 조금 전부터 어디선가 묘한 물내음이 나고 있었다. 작은 웅덩이 정도로는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나지 않는다. 여우는 본능적으로 근처에 물이 가득 있는 곳이 있다고 확신했다.

 숲은 굉장히 넓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활동 범위 자체도 넓게 잡지 않고 있었기에, 여우는 이런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여태 모르고 있었다. 그저 날이 맑은 어느 날에, 이 숲이 사실은 넓었다는 것을 문득 떠올리고서 산책이라도 나갈까 하고 정처도 없이 걸어 다녔을 뿐이었다. 단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잠시 다니다가 돌아가려 마음먹고 나온 것이었으나 점점 처음 보는 곳이 나왔고, 그때부터는 이왕 나온 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두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다니다가, 어느샌가 부터 나기 시작한 희미한 물의 향이 있는 곳으로 목표를 잡은 여우는 얼마 가지 않아서 생소한 장소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것은 이런 숲 속에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커다란 호수였다. 주위에 와서도 연하게나마 물 특유의 향 같은 것이 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계속 나무와 나무의 연속이라고 무심코 생각해버렸을 것이 틀림없었다. 온통 크고 커다란 나무들로 둘러싸인 한 가운데, 있을 것 같지 않은 장소에 그것은 있었으니까. 여우는 속으로 조금 감탄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이런 것이 있었지? 여우는 꽤, 라는 말로 얼버무려야 할 만큼의 긴 시간을 이 숲 속에서 보냈다. 그럼에도 여태 찾지 못했던 것은 역시 일정 범위에서 잘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누구 하나 말해줄 법 한데. 지나가는 말로라도 저번에 이런 곳을 봤는데, 정도의 말은 들었을 법도 한데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조금 더 미리 알았으면 가끔씩은 놀러오기도 했을만했다. 앞으로 와볼까. 여우는 괜찮은 곳을 발견한 것 같아서 이번 산책은 성과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며 흡족해했다. 오랜만에 멀리까지 나와본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호수 한 가운데로 눈을 돌렸을 때, 여우는 무언가의 위화감을 느꼈다.

 다른 어떤 호수들보다도 아름다운 색을 띄고 있으면서도, 그 바닥은 보이지 않는 깊은 수면. 그 위에는 누군가가 있었다. 수면이 마치 땅이라도 되는 듯이 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누군가는 물 위에 떠있었다. 수면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아무런 표정 없이 가만히 서서 하늘만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것을 보고 여우는 자연스럽게 알았다.

 넓고 넓은 숲 속의 그 호수에는, 정령이 떠있었다.


02.

 그것은 하늘이 비쳐 보이는 호수의 물과 비슷한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이 살랑 불 때마다 하늘하늘하게 날리는 옷과 연하늘색 머리카락의 조화는 물론 아름다웠지만, 너무나도 희미한 색이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햇빛에 먹혀 사라질 것 같은 새벽을 닮은 색이었다. 물 위에 있으니 사라진다면 증발하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여우와는 달리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것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물 위에 얌전하게 떠있던 정령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계속 하늘을 보고 있었으면서 눈이 부시지도 않은 모양인지 눈을 찡그리지 조차 않고 태연히 시선을 돌렸다. 여우가 물에 가까이 다가가 닿아서, 물결이 작게 흔들리고 나서야 그의 존재를 인식한 듯 했다. 갑자기 나타난 손님에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고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음이라기보다는 혼자 하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잔잔한 물결을 그대로 소리로 옮겨놓은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여우…….”

 정령이란 것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었다. 과연 그것을 생물이라고 분류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여우가 실제로 정령을 보는 건 오랜 시간 속에서도 처음이었다. 정령이 있다면 요괴도, 혹은 정말 평범한 동물들도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실제로 요괴나 평범한 동물들은 자주 보는 것이었다.

 여우는 자신이 그냥 여우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짐승도, 요물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요괴의 한 종류인 구미호 같은 것도, 전부 여우니까. 자신을 그런 것과 같은 취급을 하는 것은 불쾌하다고 늘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은 그런 것들과는 달랐다. 여우라 이름 붙은 것은 모두 자신의 아래에 있어 마땅한 것인데 그것들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처음 보는 것에게는 더욱.

 “건방진 소리를 하네요, 거기 너.”

 기껏해야 정령 주제에. 여우는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한번쯤 보고 싶었던 존재이긴 하지만 역시 특별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특별한 걸로 치자면 자신의 존재만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여우는 스스로 그렇게 여겼다. 정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여우가 아닌가요?”
 “비슷한 거지만 그냥 여우는 아닌데요.”
 “그럼 당신은 꼬리 아홉 달린 요물이라도 되는 겁니까?”

 정령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여우 비슷한 무언가지만 평범한 여우는 아니라고 한 것을 바탕으로 다른 가능성 하나를 내어놓았을 뿐이었다. 이 근처에 사는 여우가 아니라면, 가끔씩 나타나는 요물일 것이다. 참으로 간단한 사고였다. 정확히 호수 한가운데, 그가 떠있는 주변으로 조금씩 수면이 흔들리고 있었다. 물이 찰랑거리는 경계의 땅에 발을 딛고 있던 여우는 대답했다.

 “그런 거랑 비교하지 말아 줄래요?”

 꼬리도 하나고. 꽤 커다란 금색의 꼬리를 보란 듯이 흔들며 여우는 불만을 토했다. 그런 요괴랑 날 비교하면 상처받거든요? 딱 보면 모르는 거예요? 난 당신이 뭔지 알 것 같은데. 정령은 흔들리는 꼬리를 보면서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확실히 평소에 와서 물을 마시고 쪼르르 사라지는 여우들과는 달리 조금 특이한 색이긴 했다. 저렇게까지 밝은 금색의 털은 처음 보는 거니까. 하지만 아는 것이 있다면 모르는 것도 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종류의 어떤 것일 거라고, 그는 간단히 결론지었다. 그 이외의 가능성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할 의지가 없어보였다. 딱히 할 이유가 없으니까.

 관심이 없다는 태도를 일관적으로 취하는 정령을 보며 여우는 팔짱을 꼈다. 이 건방진 정령의 입으로 꼭 들어야겠다는 쓸데없는 의지가 가득했다. 우선 여우는 제 이름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키세 료타라고 해요.”

 정령은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당연히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답답한 여우는 제 꼬리를 빙글 돌렸다.





201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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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2. 01:49 | Posted by 에클레아

 누구든 같은 건반을 누르면 같은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과연 그럴까? 니지무라 슈조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누가 치느냐에 따른 느낌은 다르다. 그것이 여태껏 수년 간 피아노를 치면서 생각한 것이고, 또 실제로 느낀 것이었다. 가끔 그런 사람이 있었다. 악보만 가져다준다면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곡을 치면서도 전혀 다른 음색을 내는 사람. 그런 사람의 연주를 듣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들리는 소리가 그러한 종류의 것이라 니지무라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전에 쓰던 연습실을 지금 쓰는 사람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나 소리의 근원지를 잘못 짚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니지무라는 소리가 들리는 대로 홀린 듯이 움직였다. 처음 듣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친근하게 귓가에 다가왔다. 대체 누가 이런 연주를. 피아노 소리가 가장 가까이 들리는 곳에서 니지무라는 발을 멈췄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바깥에선 보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봐 연주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 하던 차에, 갑자기 소리가 끊겼다. 문고리로 향하던 손을 움찔하고 내려놓았다.

 발소리를 들었나? 본의 아니게 방해해버린 건가? 안에 있는 연주자가 자신이 온 걸 알고 연주를 멈춰 버린 거라 판단하고 니지무라는 잠시 문 앞에서 망설였다. 그래도 역시, 이대로 그냥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런 연주를 하는 사람의 얼굴 정도는 보고 싶었다. 조용한 혼자의 시간을 방해한 방해꾼 취급을 받더라도.

 안에서 움직이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아직도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거겠지. 저쪽에서는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누구신데 나타나서 방해했냐며 악보로 맞아도 크게 할 말은 없었다. 아니, 딱히 그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닌데.

 아는 사람이 본다면 놀랄 정도로 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니지무라는 문을 열었다. 아차. 노크부터 했어야 하나. 이제 와서 뭔가 중요한 게 기억이 난 것 같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실례…….”

 어? 최대한 문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열고 고개를 든 니지무라의 앞에는 커다란 피아노와, 그 앞에 얌전하게 앉아 있는 한 학생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빠진 소리를 낸 니지무라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처음 보는 얼굴의 그 학생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찬찬히 니지무라를 보고만 있었다.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를 얼굴이었다.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기 전에 니지무라가 먼저 말을 걸었다.

 “금방 연주한 게 너냐?”

 질문이 이상했는지 그제야 아무것도 없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작게 웃음소리도 났다.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인상이 섞여있던 얼굴과는 달리 얌전한 목소리였다.

 “……비밀입니다.”

 여기에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한 명 밖에 없는데 비밀은 무슨 비밀이야. 니지무라는 아직도 잡고 있던 문고리를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피아노 바로 앞까지 가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낡은 악보 하나가 눈에 곧바로 들어왔다. 곡 제목은 손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아까 연주했던 그 곡의 악보가 저것인 듯 했다. 그런 대답을 할 거라면 좀 더 제대로 숨겼어야지. 니지무라는 못 본 척 해주기로 하고서 시선을 아래쪽에서 쭉 올렸다.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굉장히 튀어보였다. 고양이 같기도 하고, 어려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보다 말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신입생?”
 “…….”
 “……?”
 “아뇨. 그저 학년이 달라서 처음 보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잠시 망설이던 틈을 제 학년도 까먹어서 고민한 거라고 생각한 건지 니지무라는 측은한 눈을 했다. 그게 무슨 뜻을 담고 있는 눈인지 딱히 알아차리지 못한 그는 악보에 묻은 먼지를 톡톡 털어내며 별 일 없었다는 양 눈웃음을 지었다.

 “이름은 알려드릴 수 있는데.”
 “그래놓고 또 비밀이라고 할 거잖아.”
 “그런 걸로 장난치진 않아요.”

 선배.

 어?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자연스럽게 선배라고 칭하는 그를 보며 니지무라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그렇게 나이 들어 보였나. 그가 말한 대로 2학년이라면 선배는 맞지만. 그래도. 그럼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 의도를 먼저 알아차린 듯 묻지도 않은 말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카시 세이쥬로.”





201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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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2. 01:43 | Posted by 에클레아

 "쿠로콧치이, 내일 바빠요?"

 파티라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돌아오자마자 기분 좋다는 표정을 한껏 드러내고 매달리는 제 주인을 보고 쿠로코는 한숨을 쉬었다. 얼굴이 빨갛지는 않은걸 보니 단순히 분위기에 취한 것 같았다. 자신보다 더 큰 덩치가 매달려오는 것을 버티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하루이틀 이런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버틸 것은 되지 못했다.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 얼굴을 묻고 있는 키세의 무게에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기 시작하면서 애써 괜찮은 척 쿠로코는 대답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바쁩니다. 지금 이걸 묻고 있는 주인이 일을 잔뜩 던져주고 간 탓이었다. 처음에 서류 정리 하나 못 하던 거에 비하면 굉장한 발전을 했으니 이 정도는 도와달라나 뭐라나.

 "오늘 빨리 끝내면 내일은 일 안 주고 쉬게 해줄게요."
 "못 끝냅니다. 지금 시간을 봐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그런가. 그럼 남은 건 내가 할 테니까 내일은……."
 "그 말은 감사하지만 최소한 맡은 일은 다 하고 싶습니다."

 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쿠로코는 딱 잘라 대답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인에게 반항하는 거냐고 화내지는 않을까. 자신이 한 대답이 조금도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계속 휘청거리니 난감하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불안하다고 생각한 건지, 키세는 쿠로코에게 매달려서 부비적대고 있다가 눈을 두어번 깜박이고 몸을 일으켰다. 놀랐다는 표정이다. 역시 화내는 걸까.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쿠로코는 어떤 말이든 들을 각오를 했다. 하인이 주인에게 쓴 소리 듣는 건 어디에서나 흔하게 있는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각오와는 달리 키세의 입에서 나온 건 예상과 동떨어진 말이었다.

 "혹시 뭐 먹고 싶은 건 없어요?"

 왜 그렇게 눈을 피해요?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오히려 키세쪽에서 먼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오는 통에 쿠로코는 반대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날아온 난데없는 질문 탓도 분명 있으리라.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밤 중에 갑자기 먹고 싶은 거라니. 앞의 질문과도 앞뒤가 맞지 않다. 고개를 들어 키세의 표정을 보고도 그의 질문이 가리키는 바를 읽을 수 없었던 쿠로코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고개를 작게 저었다. 없습니다.

 연이은 두 번의 거절에도 키세는 흐응, 하는 소리를 낼 뿐 아무런 강제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원하는대로의 대답이 나오지 않아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은 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거리는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친철하게 나오는데 왜 다 거절하냐는 의문을 담은 눈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키세가 그럼, 하고 운을 떼자 쿠로코는 그와 시선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가고 싶은 곳은요?"
 "……없습니다."

 질문에 대해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 짧다보니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고 단 두 마디로 끝나버렸다. 이번에는 조금 뜸들이는 척을 했더니 키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 아닌 어색함이 흐르는 듯 했다. 그럼에도 쿠로코는 딱히 그 태도를 고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여태까지 한결같은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키세의 눈가가 움찔했다.

 "정말!"

 세 번의 거절. 키세는 그제서야 큰 소리를 냈다. 화가 난 것과는 달랐다. 답답한 마음에 울컥해서 튀어나온 말임에 틀림없었다. 얌전하게 그의 앞에 있던 쿠로코는 고개를 숙였다. 시키실 것이 없으면 물러나겠습니다. 짧게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기도 전에 키세의 손이 쿠로코를 잡아세웠다. 가려고 하니까 반사적으로 잡은 건지 힘조절이 되지 않은 탓에 잡힌 손목이 조금 아팠다. 가지마요! 어디서 내 말을 무시하냐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키세는 다시 입을 열었다가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은 채 닫았다. 입을 다물고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고 쿠로코는 다음에 키세가 할 말을 어렴풋이 확신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차리라구요! 데이트 해요! 내일 당장!"

 그리고 그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렇게 달가운 말은 아니라고 쿠로코는 생각했다. 데이트니 뭐니, 그런 말을 키세가 먼저 꺼내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겠지 싶지만. 역시 그의 말을 승낙하는 건 크게 내키지 않았다. 스스로도 괜찮을 리가 없었다. 하인 주제에.

 "별로, 못 알아차린 건 아닙니다만……."
 "그 말은?"

 말꼬리를 흐렸더니 키세는 쿠로코가 이번에야말로 긍정의 대답을 내어줄 거라고 기대라도 하는지 들뜬 목소리로 되물었다. 키세의 예상에 따르면 쿠로코는 당연히 알겠다고 대답할 것이었다. 당연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키세 료타 님이신데. 쿠로콧치 주인이라구요. 하지만 잠깐의 사이 반쯤 혼자서 확신해버린 키세를 배신하듯 돌아오는 대답은 가차없었다.

 "싫습니다."
 "너무해!"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날 찬 사람은 없는데! 쿠로코의 당연한 승낙을 전제로 그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하지 않은 채 내일의 데이트 코스까지 생각하고 있다가 의외의 대답을 받은 키세는 왜인지 억울하다는 것 마냥 한껏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그야 당연하잖아. 내가 누군데. 하인에게 차일 리가. 이렇게 된 이상은 어떻게든 승낙을 받아내고 말리라. 정 안된다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명령이라도 내릴 생각으로 쿠로코를 설득하려던 키세는 어느새 앞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워낙 눈에 띄지 않으니, 그가 꾸벅 인사하고 물러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겠지. 한 번 싫다는 건 싫다는 건가. 쿠로코 테츠야는, 여전히 자기주장이 강한 하인이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이러면 더 고집을 꺾어버리고 싶지만. 주위에 있던 메이드 하나에게 그를 빨리 불러오라고 하고 키세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용서 못 해.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짜증을 내는 아이처럼, 키세는 쿠로코가 올 때까지 그의 이름과 용서 못 한다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쿠로코는 모르겠지만, 어릴적부터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았던 백작님에게 새삼스럽게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하나 생긴 날이었다.





201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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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 12. 01:40 | Posted by 에클레아

 어른들이 많았다. 아이라고는 너와 나, 둘 뿐이었다. 물론 나는 아이라고 칭할만큼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나, 어른들에게는 그리 보였다. 어떤 이는 어린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조차 사고라고 했다.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어 이런 상을 당하느냐. 그것이 나쁜 의미가 아니라 너를 불쌍히 여겨 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있다. 그 날, 제 몸도 혼자서는 가누지 못하는 너는 영문도 모른 채 내 품 안에서 엉엉 울었다. 주위의 어른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것도 제 부모를 찾으며 슬피 우는 거라 하며 안타까워했다. 다만 너를 가엾게 여긴다 해도 이후의 책임마저 지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누구 하나 선뜻 너를 데려가겠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때의 나는 그것이 화가 났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너를 맡겠노라 했다. 겉으로는 반대했지만 뜯어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네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앞으로는 나랑 함께 살아요, 쿠로콧치. 그저 서럽게 울기만 했던 너는, 아마도 그 날 주위에 가득하던 하얀 꽃의 의미조차 몰랐을 것이다.


 키세 군,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너와 살게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서로 같이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질 때 쯤에, 나는 어느새 어른이 되었고, 너는 스스로 걷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여전히 조그마한 너는 쫄래쫄래 달려오며 바깥을 가리켰다. 네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해 보일 것이었다. 일곱 살, 아직 어린 나이에 너는 일찍 아이 티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내 잘못도, 하물며 네 잘못도 아니었다. 네가 내 손목을 잡고 작은 발로 달려간 곳에는 노란색의 작은 꽃이 나무 가득히 피어있었다. 너는 그 꽃이 나를 닮았다 말했다.

 저것은 무슨 꽃입니까?
 산수유라고 해요. 나중에는 새빨간 열매가 열리는 나무.
 열매라면, 먹을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에요. 약으로도 쓰이는 열매니까.

 어린아이의 호기심에 가득찬 눈은 싫어하지 않았다. 너는 나중에 맺히게 될 열매를 꼭 먹어보고 싶다며 활짝 웃었다. 열매가 열리면 같이 따서 먹어보자고, 나는 네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산수유 꽃이 뜻하는 것은 영원불변의 사랑. 일찍이 혼자가 되었던 너와도, 나와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2014.02.04
쿠로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키세가 데려다 키우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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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황] still want to stay close to you

2016. 1. 12. 01:38 | Posted by 에클레아

01.


 병에 걸렸다.
 ……라고 하는 건 사실 거짓말이지만, 확실히 지금 이 상태가 정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병에 걸린 걸지도 모르고. 물론 겉으로 볼 때는 정상. 다른 사람이 볼 때도 정상. 분명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극히 평범한,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래서 눈치 채는 게 더 늦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건 평소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겨우 그것 가지고. 그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 것뿐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일로 넘기기만 하다가,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 계기 또한, 굉장히 사소한 것이었다.

 누나가 아끼던 물건이 있었다. 그게 뭐였는지는 또 기억이 안 나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한다. 알아도 몰라도 크게 상관없는 것이기도 하고. 그 날은 쉬는 날이었다. 집 안에는 자신과 누나 둘. 부모님은 어딘가 외출을 하신 상태였다. 오랜만에 연습도, 일도 없는 날이었기에 조용히 휴식이나 취하겠다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잠을 자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바깥에선 누나들이 움직이고 있는 건지 계속 누군가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외출 준비라도 하는 모양이지. 눈을 감았더니 나른한 기분에 잠이 몰려와 잠시 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잠드려고 할 때쯤 누나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비명은 아니고, 여자애들이 놀랄 때 자주 지르는 소리였다. 그리고 뒤이어 서랍을 열고 닫는 소리와 집 안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니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 잃어버린 물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알아서 찾겠지. 다시 잠을 청하려고 돌아누웠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료타, 혹시 내 방 테이블 위에 있던……. 그렇게 시작된 제 큰 누나의 말을 들어주고 나서 키세는 전혀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런 게 있었던가. 기본적으로 서로가 가지고 있는 물건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키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누나 방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아. 네가 예전에 생일선물이라며 준 거였잖아. 선물?

 선물로 준 거라면 직접 골랐을 테니 아는 물건이었을 텐데. 잠시 생각해봤지만 누나가 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누나에게 무언가 줬다는 일 자체가 요만큼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사실 자체가 없었다는 것 마냥. 누나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안 받은 걸 받았다고 해봤자 무슨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앞에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누나에게 그런 적 없는 것 같다고 할 수는 없어서, 키세는 괜찮다고 했다. 집 안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야. 그렇겠지? 누나는 다시 찾아보겠다며 방문을 닫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걸 잊어버렸을 리는 없었을 텐데. 혼자 남은 침대 위에서 키세는 중얼거렸다.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갑자기 어떠한 것을 떠올리려고 하면 기억나지 않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다. 그러다가 다른 걸 하고 있을 때쯤 갑자기 확 떠오르겠지. 그런 거라고 여기며 키세는 다시 누워서 눈을 감았다. 네가 준, 생일선물. 누나의 말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찾던 것이 대체 뭐였는지가 궁금해서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굉장히 답답했다. 머리를 한 번 뒤집어서 찾아내고 싶을 정도로. 왜 사람의 머리에는 검색기능이 없는 걸까. 진심으로 한탄하고 싶었다.

 밖으로 나왔더니 거실에 작은 누나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큰 누나는 한참 찾아다니더니 어느새 나간 모양이었다. 일어났네. 키세는 제게 시큰둥하게 인사 아닌 인사를 하고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리는 작은 누나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뭐야. 너도 보게? 큰 누나 아까 뭐 찾던데, 찾았나 싶어서. 아,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으니까 들어와서 다시 찾을 거라나 뭐라나. 언니도 잃어버리려고 그런 거 아니고, 화내지 마? 료타, 남자애가 쪼잔하게 그러는 거 아냐. 화낼 생각 전혀 없는데요…….

 딱히 화내려던 건 아니고, 혹시라도 찾았으면 그걸 보려고 했었다. 눈으로 직접 그 무언가를 보고나면 분명 다시 기억이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못 찾았다고 하니 그것도 무리고. 답답하다. 빨리 떠오르면 시원한 마음으로 잘 텐데. 키세는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벌써 한참 지난 일이잖아. 오히려 지금까지 안 잃어버리고 가지고 있어 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라고. 넌지시 던지듯이 작은 누나의 대답을 유도해내며 키세는 흘끔거렸다. 대충의 시간대라도 들으면 단서가 될 것이었다. 어……, 글쎄. 언제였더라. 료타가 유치원 다닐 때? 그것보단 좀 더 뒤였나. 소학교? 작은 누나의 말에 따르자면 그렇게 오래 된 일도 아니었다. 뒤의 말을 계속 들어보면, 처음에 답한 유치원은 너무 멀리 간 거였다. 길어봤자 5년 이내의 일이라면 잊어버리는 게 더 이상한……. 어라?

 그러고 보니 중학교 입학 이전에는 뭘 했더라?

 



02.

 “그러니까, 미도리맛치!”
 “시끄럽다는 것이다, 키세.”
 “하나만 대답해주면 된다니까요. 하나만!”
 “정말이지. 끈질긴 녀석이라는 것이다…….”

 평화롭게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키세가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된 미도리마가 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 궁금한 게 뭐냐는 것이다. 미도리마는 굳이 키세가 지나가던 자신을 붙잡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궁금한 걸 물어볼 사람이라면 아오미네도 있고, 쿠로코도 있을 텐데. 당연한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으면서 미도리마는 안경을 고쳐 올렸다.

 “그게요, 사람이 갑자기 옛날 기억이 안 나는 경우도 있어요?”
 “갑자기 사람을 붙잡으면서 한다는 이야기가 그거였나.”

 한심한 질문이라는 미도리마의 표정에 키세는 세차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표정에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거든요!

 “기억력의 문제라면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당연하다는 것이다. 키세 너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가? 당연히 아닐 테지. 그게 아니라도 갑자기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면 기억나지 않는 일도…….”
 “재밌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네. 나도 끼워주지 않겠어?”

 어느새 조용히 둘의 곁에 다가온 아카시가 웃으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세는 깜짝 놀란 건지 히익, 하는 소리와 함께 쥐고 있던 미도리마의 옷자락을 손에서 놓았다. 미도리마는 눈가를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척 태연하게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우와, 아카싯치……. 쿠로콧치 놀이라도 하는 거냐구요.”
 “난 평소처럼 걸어왔어. 너희가 눈치 채지 못한 것뿐이지.”
 “그런 것 치고는 꽤나 즐거워 보이는군, 아카시.”

 어라, 그래? 미도리마를 향해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 아카시는 키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의 주제를 먼저 꺼낸 것이 미도리마가 아니라 키세라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래서? 이 사람 많은 복도 한복판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미도리마의 말대로 아카시는 즐겁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숨겨봤자 아카시가 그렇냐고 순순히 속아줄 사람도 아니고, 숨길만한 물음도 아니기에 키세는 아카시에게도 아까 미도리마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다. 아카시는 키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건지 팔짱을 꼈다.

 “키세, 그건 갑자기 왜?”
 “아뇨, 갑자기. 그냥…….”
 “뭐 잊어버린 거라도 있구나?”
 “어떻게 알았어요…… 가, 아니라! 궁금해서 물어본 거라니까요. 단순히 궁금해서. 그런 경우도 있나 하고.”
 “내게 거짓말을 해보겠다, 이건가.”

 히익. 역시 아카시는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며 키세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럼 키세, 내게 더 볼 일이 없다면 먼저 가겠다는 것이다. 키세가 잡을 새도 없이 미도리마는 빠르게 복도의 저 너머로 사라졌다. 아카시에게 거짓말은 통할 리가 없다는 걸 깨닫고 키세는 재빠르게 아카시의 손목을 낚아채고 구석에 있는 계단을 올랐다. 옥상 문 앞까지 올라와서 주위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난 뒤에, 키세는 비밀이라는 의미로 손가락을 제 입술에 가져다댔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아요. 아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카시가 이런 걸 아무한테나 말하고 다닐 만한 사람도 아니라는 걸 키세도 알고 있지만.

 “실은 며칠 전부터 어릴 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잠시 이어진 키세의 말을 듣고 나서 아카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릴 때의 기억, 즉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잊어버렸다는 말이지? 하나도 기억 안 날 정도로. 아카시의 물음에 키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컨디션 문제인가 했는데, 며칠이 지나도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깨끗하게 잊을 수 있나 싶어서.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급격하게 우울해지는 키세의 밝았던 표정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아카시는 제 머리를 톡톡 쳤다.

 “혹시 최근에, 습관적으로 늘 해오던 일을 잊거나 하진 않았어?”
 “에……?”
 “아니면 집에 돌아가는 길을 이상하게 헤맨다거나.”
 “무, 무슨 소리예요?”
 “키세, 잘 들어. 너무 충격 받지는 말고. 내 생각엔 안타깝게도 네가 알츠하이머,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치매에…….”
 “잠깐. 스톱. 스톱! 거기까지! 더 말하지 마요!”





2014.01.16
1월 청황온리 신간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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