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 세이쥬로. 용모 단정, 성적 최상위권, 1학년이면서 학생회장과 농구부 주장을 겸하고 있음. 유서 깊은 명문가의 유일한 후계자. 본가는 도쿄. 교토에는 분가가 있다고 한다. 백마도 기르고 있다나. 여학생들에게는 아카시 님으로 불리고 있으며, 친위대도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정보 또한 존재. 누가 봐도 요만큼의 흠집도 없을 것 같은 이 녀석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다. 무슨 문제냐고 한다면, 아마도 정신적인 문제겠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기준은 나.
나는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산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꽤 여러 타입의 인간을 보아왔다고 자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 녀석은 특별하다. 좋은 뜻이 아니다. 특별할 만큼 이상하다는 뜻이다. 키 작은 걸 남 탓으로 돌리고 싶은 건지 머리가 높다며 멋대로 앞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질 않나, 경기에서 지면 눈알을 뽑아준다느니 하질 않나. 웃기지마라. 네 녀석 눈알 같은 건 줘도 안 가져. 받아봤자 쓰레기밖에 더 되겠냐고. 아니, 그 이전에 기분 나쁘니까.
어쨌든, 그런 아카시가 이상 징후를 보인 것은 윈터컵 결승전 도중의 일이었다. 원래 저런 성격이겠거니 하고 이해해, 볼 수는 없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일이나 하면 되니까. 그것뿐이었는데. 아카시가 언젠가 말했던 적이 있었던가. 좋아하는 음식이 탕두부라고 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굉장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음식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멘탈 상태 또한. 네 녀석의 머리는 두부로 이루어져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경기는 끝나고 나서 지지고 볶든 하라는 의미로 한 번 쏘아붙여줬을 뿐이다. 할 말은 하는 나, 역시 멋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자면 문제는 아마도 그것이었던 것 같다. 사실은 어떤 다른 세계의 오드아이인 레드 드래곤인데 차원을 넘어온 충격으로 여태 그 모든 것을 잊고 있다가 한꺼번에 모든 기억이 돌아온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그 녀석은, 그 시점을 기점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단순히 인생 첫 패배로 인한 충격에서 오는 심리적 변화는 아니었다. 정말로, 그건 다른 사람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말할 때의 단어 선택이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그래서, 나는 물었다. 윈터컵이 끝나고 나서 교토에 돌아가기 전이었다. 너 역시 예전의 그 느낌이 아닌데. 아카시는 평생 한 번도 지어본 적 없었을 것만 같은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 하던데 혹시 그걸 아는가 모르겠다. 굳이 말해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기에 가만히 있었더니 아카시는 무언가를 추억하듯 대답했다. 동생 같은 아이가 하나 있었거든요. 질문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싶은 뜬금없는 대답이었지만, 다년간의 덕질로 인한 내 직감은 그 한 마디로 눈치 채버린 것이다. 이것은 설마 또 하나의 나.
그렇다. 정말로 아카시 세이쥬로는 두 명이었다.
충격적이군. 그리고 사실은 이쪽이 진짜 아카시라는 것도. 처음 본 그 녀석이 가짜 아카시라니. 여태 내가 알던 세계는 실재하지 않는 세계였다는 것인가. 이건 마치 사실 링고땅이 여동생이 아니라 누님이었다 수준의 충격적인 이야기라고. 물론 내 링고땅이 그럴 리가 없지만. 이래서 3차원이란.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한쪽이 진짜고, 한쪽이 가짜라고 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내가 아는 아카시는 네가 아니야. 아카시는 그런가요, 하고 쓰게 웃었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눈치 챌 거라는 것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카시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을 선택한 건 제가 아니었죠. 내가 이 녀석에게 다시 존댓말을 듣는 날이 올 거라고는. 애초에 그런 걸 바란 적도 없었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런 녀석이었다.
난 일이 있어서 너희보다 늦게 교토에 갈 거니까, 알아둬. 감독에게는 말해뒀다. 네, 이미 들었어요. 그럼 나중에. 다른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는데도 아카시에게서 자꾸만 위화감이 느껴졌다. 하긴, 그걸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쪽이 이상한건가. 애초에 더 이상 저 녀석이랑 관계될 일도 없을 테니 이대로 잊어버리는 게 좋을지도. 졸업하고 나면 더 이상 마주칠 필요도 없으니까. 아카시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느낌이다보니 사회에 나가서도 마주칠 것 같진 않았다. 그러면 그걸로 된 게 아닐까. 다른 사람으로 바뀐 시점에서 얄팍한 인연도 끝이다.
……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래도 솔직히 역시 신경이 쓰인단 말이야. 그 녀석이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한 것이 마치 내 탓 같은. 그래, 딱 그거다. 생각하면 할수록 찝찝하다. 나는 할 말을 했을 뿐인데. 나는 너한테 불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대체 뭔데. 마치 내가 말 한 번 잘못해서 한 사람 인생을 망쳐놓은 것만 같잖아. 난 평범한 독서 애호가라니까. 그럴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고. 그 전에 그 녀석이 두 명이라는 것따위,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딘가의 흔한 라노베 주인공 같은 설정의 인간이라고 생각해봤던 적은 있지만 설마 이중인격 속성까지 부여되어 있을 줄이야. 상상 이상의 인간이다. 어쩌면 정말로 이세계의 드래곤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인간계에 심심풀이로 내려온 마왕일지도. 아직도 본성을 숨기고 있는 건가, 아카시 세이쥬로.
그 녀석은 내게 도쿄에서 무슨 다른 할 일이 있는 같은 건 더 이상 물어보지 않고서 그대로 자리를 떠나갔다. 궁금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것마저 이미 알고 있는 건지는. 아카시라면 분명 이미 다 알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긴 하다. 물론 물어봤어도 대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저런 녀석들은 이해하지 못할 테지. 나머지 무관의 어쩌고 하는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그 녀석들은 내 취향 같은 건 요만큼도 존중해줄 것 같지 않으니. 아카시는 그 중에서는 조금 나은 편인가. 그래봐야 현실에 충실한 녀석이었지만. 다른 의미로도 아카시를 비롯한 나머지와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그럼 나도 슬슬 자리를 떠볼까. 여기까지 더 챙겨온 옷이라고는 교복 밖에 없었지만 학교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혀있는 져지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농구를 해서 다행이야, 나, 같은 말은 하지 않겠지만, 타이밍이 좋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덕분에 도쿄까지는 그냥 왔으니까 말이야.
역시 연말이라면 이벤트다. 그것도 도쿄에서 열리는. 나는 이 날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이건 중요하다. 매우 중요. 미리 숙소를 잡아두어서 다행이다. 도쿄에 연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아카시 녀석의 본가가 도쿄에 있다고 했던가. 여기까지 왔으면서 본가에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가는 건가. 져서 가기 싫은 걸지도. 내가 알 바는 아니다. 나는 오늘 푹 쉬고 나서 내일 전장에 뛰어들어야 하니까.
이후의 일을 생각하자면,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이 비틀릴 일이 생기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따위의 묘사가 나왔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내 인생은 라노베 속의 세계가 아니었다. 그걸 추억하는 입장에서야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나, 평범한 한 명의 고등학생인 마유즈미 치히로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을 뿐이다.
그 길로 곧장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들어가서, 그대로 푹 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각오를 다졌다. 목록은 이미 다 정리해서 적어두었다. 이 정도의 준비도 없이 여기에 올 리가 없지. 교복 차림이라는 것이 조금 걸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 목적을 달성할 수만 있다면.
겨울의 바깥바람은 제법 차가웠다. 12월 말이니 안 차가우면 이상하긴 했다. 그렇다면 그건 세상이 망할 징조다. 아무튼, 새벽의 거리는 조용했고, 바람은 차갑게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일찍 나왔으니 그 동안의 기다림이 지루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시간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거의 모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이 정도의 긴 줄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되는 것 정도는 전혀 예상 밖의 문제가 아니었으니 패스. 교복이라고 해도 이쪽을 신경 쓰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오히려 주위의 코스프레가 더 눈에 띄었으니 그것도 패스. 단지, 기다림의 도중에 어디서 본 얼굴과 마주친 기분이 들었던 것밖에 없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했던 적은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묘하게 기억에 남았던.
그래, 그러니까 나는 저 얼굴을 어디서 봤냐면, 토오에 저렇게 생긴 녀석이 하나 있었지 않았던가. 툭하면 사과하던…… 아니, 아니다. 토오의 레귤러씩이나 되는 녀석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굉장한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아까 그 얼굴과 다시 눈이 마주쳤나 싶었더니, 엄청난 기세의 죄송하다는 외침이 돌아온 것이다.
존잘님 부스에서.
2014.11.30
적우 온리 신간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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