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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적] 変わらないもの

2017. 5. 14. 23:35 | Posted by 에클레아

*2013.06에 나왔던 녹적앤솔의 개인 파트입니다. 배경은 테이코.






  체육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정리를 끝낸 후에 돌아가려 미도리마는 밖으로 나와서 체육관 내부의 불을 껐다. 보통 이런 건 주장의 일이겠지만, 아카시가 다른 일로 바쁠 때에는 가끔 부주장인 미도리마가 하기도 했다. 미도리마는 이것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먼저 스스로 하겠다고 나서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카시는 내 일이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아카시가 감독에게 불려갔기 때문에 대신 정리를 했던 것인데, 타이밍 좋게도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순간 저 멀리서 이쪽으로 오던 사람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정리가 끝나기 전에 와서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아카시는 사과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빨리 끝내고 온 건 아니겠지. 이야기는 제대로 한 것인가. 응. 아카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와 감독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미도리마는 알 수 없었고, 알 생각도 없었기에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아카시는 먼저 말을 꺼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늘 그랬다. 아카시와 함께 하교를 하기 전에 빈 교실에 앉아서 장기를 두는 것은, 둘만의 무언의 룰 같은 것이 되어있었다. 딱히 누가 먼저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사실 장기라면 굳이 하교 시간이 아니라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두고는 했으나 어쩐지 조금 다른 느낌을 주고는 했다. 단순히 주위에 다른 학생들이 가득 해서 시끌시끌한 교실인가, 아니면 단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교실인가 하는 별 것도 아닌 차이에 불과한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미도리마는 이 시간이 훨씬 좋았다. 조용하니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다른 이유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번 시험은 어땠어? 중학 시절의 마지막 시험이었잖아."


  자신의 차례가 끝나고 나서, 아카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미도리마는 장기판을 보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카시는 자신의 차례가 끝나서인지, 어느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언제나와 같은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미도리마는 괜히 고개를 숙여 다시 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평소와 같다는 것이다. 어떤 시험이라도, 인사를 다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그래? 미도리마다운 대답이네."


  아카시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미도리마는 자신의 말을 하나 움직였을 뿐이었다. 네 차례라는 것이다, 아카시.


  "오늘은 힘들겠는걸."


  진심인지 장난인지,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움직인 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말을 옮기기 전에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을지 잠시 고민하는 듯 작게 소리를 내더니 손을 뻗었다. 이게 좋을까. 그러나 허공에 멈춘 손은 곧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하던 미도리마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답지 않게 신중하군, 아카시. 무슨 소리야? 나는 항상 신중했어.


  "사실 이번 시험은 조금 어려워서 고생이었는데."


  아카시는 잠시 아까의 화제로 말을 돌려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을 집어 움직이고는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미도리마는 역시나, 하는 말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오미네나 키세가 말했으면 믿었을 테지만 그 말을 한 것이 아카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아카시의 그런 말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아마 그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들조차 장난도, 하고 웃어넘기겠지. 아카시는 그것을 믿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 표정에 아까부터 계속 미소를 걸고 있는 채였다.


  "아카시."

  "응?"


  자신의 차례를 진행하기는커녕 안경을 고쳐 쓰면서 미도리마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기대라도 하는 것 마냥 아카시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별로 기대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네가 그런 얼굴로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거, 어느 쪽의 이야기야?"

  "둘 다."

  "어라, 들켰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아카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그 말에 넘어갈 사람은 없다니까. 그에게 농담은 그쯤 해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 미도리마는 그가 움직인 말을 그제야 바라보면서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대체 뭐가 오늘은 힘들겠는걸, 이냐. 아니, 농담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심하다. 움직일 수 있는 말이 없다. 어느 것을 움직이든, 다음 차례에는 확실하게 질 것이 뻔했다. 미도리마는 말을 움직이려다 말고 손을 내려놓았다. 다 알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왜 그러냐고 묻는 아카시의 앞에 있는 말부터 하나하나 집어 들어 정리하면서 그는 짧게 대답했다. 졌다는 것이다.


  장기를 둘 때,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 먼저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는 했다. 장기에 한정해두었지만, 그 이유는 그 외의 일에 있어서 둘이 직접적으로 경쟁할 일은 딱히 없기 때문이라는 쪽이 맞았다. 물론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가령 예를 들자면, 3년 내내 바뀌지 않는 둘의 등수라던가. 이것은 절대 미도리마가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카시가 미도리마보다 조금 더 뛰어나기 때문인 결과였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늘 어딘가에 있었으나 할 수 없었을 뿐이고.


  이런 것에 비하면 장기는 조금 달랐다. 보통 이런 게임은 이기는 날이 있다면 지는 날도 있고, 공평하게 승패가 갈리는 게임일 텐데 어쩐지 아카시에게만은 그것이 늘 예외로 적용되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건 어디까지나 게임이다. 게임 하나에서도 인사를 다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런 것으로 복잡하게 따져갈 생각은 없었다. 게임은 휴식을 위한 것이고, 재미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진다면 패배는 깨끗하게 인정. 혹시라도 이긴다면. 그럴 일이 있을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긴다면, 그때는 기뻐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 언젠가, 네게 승리할 수 있다면.


  둘이 함께 하는 하굣길 역시, 하교 전에 함께 장기를 두는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집의 방향이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지만, 갈라지는 길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란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혼자 걷는 길보다는 둘이 같이 걷는 쪽이 더 나은 것은 당연하니까.


  "평소보다 조금 늦었네, 오늘은."


  교실에서 장기판을 정리하고 사물함에 넣은 뒤, 미도리마와 아카시는 함께 나와서 교실의 문을 잠갔다. 가방을 메고 나란히 복도를 걷다가,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서 아카시는 중얼거렸다.


  "당연한 것이다. 네가 감독과 이야기를 한 시간이 있으니."

  "빨리 끝났다고 생각했거든."


  설마 그렇게 오래 있었을 줄은 몰랐다며 어깨를 으쓱하던 아카시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올려다보기에 높은 건 여전하다. 하지만 항상 느끼는 키 차이가 오늘따라 조금 더 커보였다. 메워지지 않는 그와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렇게 그를 계속 올려다보고 걸으면 목이 아플 것 같다고 판단한 아카시는 그를 힐끗 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툭 말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아카시는 뜸을 들이듯 말을 끊었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이 궁금했는지 이번에는 반대로 미도리마 쪽에서 아카시를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태여서 그런지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붉은색의 짧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자신을 기준으로 봤을 때, 조금 아래의 아카시. 실제로 신장을 재어본다면 그 수치가 결코 조금, 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키가 꽤 큰 편에 속하는 탓도 분명 있었다.


  아카시는 가끔이기는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기도 하는 탓에, 미도리마는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평소에는 늘 상식의 범위에서 말을 하고, 행동하는 주제에 가끔씩 왜 그러는지 미도리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면까지도 전부 아카시 세이쥬로 라는 사람의 한 면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라고는 해도. 하지만 미도리마의 걱정 어린 눈빛과는 달리, 아카시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평상시와 같은 극히 평범한 주제였다.


  "고등학교는 정했어?"


  아. 생각해보니, 벌써 그런 때가 와있었다. 여태까지는 시험기간인 탓에 반쯤 잊고 있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사항이지만 지금, 중학교 3학년의 마지막 시험이 끝난 이 시점. 이제 학교생활에서 남은 것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방학이니 졸업이니 하는 것은 그냥 시간만 지나면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고. 아카시의 시기에 딱 맞는 질문에 미도리마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있더라. 학교 이름이라면 여럿 들었다. 하지만 지금, 마음에 정해둔 학교는 있었던가?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아직 이라는 것이다. 감독이 추천해 준 학교라면 있지만."


  다수의 일반 학생들은 집 근처를 선호하지 않을까. 미도리마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에게 중요한 건 단순히 집 근처에 있는 학교인가, 는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이것을 묻고 있는 아카시에게도, 곧 여러 학교의 사람들이 찾아 올 것이 뻔했다. 서로 자신의 학교에 와달라는 것이겠지. 자신에게는, 기적이라 불리는 그들에게는 적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감독 또한 그런 것을 감안하고서 몇 개의 학교를 추천해주었고. 그래도 역시 벌써 결정 내리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는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


  꽤 진지하게 생각해서 대답을 했던 미도리마와는 상반되게도, 아카시의 입에서 나온 것은 굉장히 간단한 대답이었다. 먼저 질문을 했던 아카시는 그냥 그렇게 되물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표정만 보고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도 없었다. 아카시는 대체 무엇을 알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아무런 이유없이 그게 묻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어떠한 특정한 학교의 이름이 대답에서 나오길 바랐을까?


  어쩐지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하교하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의 마지막 시험은 대실패. 미도리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실패라고 할까, 정확히는 3년 내내 같은 성적이었지만. 그래. 그것은 3년 내내 시험 성적으로 아카시에게 이기지 못 했다는 것을 뜻했다. 언제나 제일 위에 적혀있는 아카시 세이쥬로 라는 글자는, 한 번도 그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었다. 이번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역시 마지막까지 인가. 미도리마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마지막 시험의 점수를 받고, 등수를 받고, 모두가 진학할 고등학교의 이야기나 졸업에 대한 이야기로 들떠있는 이 시기는 학교 전체가 붕 떠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디까지나 저것은 3학년에 한정되어 있는 이야기일 텐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소란스러운 복도를 걷다가도, 이제 이 학교를 떠날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상기시켜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랬든 저랬든, 3년간 학교에도 정이 들었다는 것이리라.


  "어라, 미도리맛치."


  복도의 저 끝에서부터 걸어오는 낯익은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고 말투만 들어도 누군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유일한 사람. 드물게도 주위에 여자애들을 끼고 오지 않은 키세는 먼저 반갑게 인사를 했다. 2학년 때나 지금이나, 주위의 상황들은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를 대하는 키세의 태도는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미도리맛치 반은 벌써 냈어요?"

  "무엇을, 이라는 거다. 앞도 뒤도 없는 질문이군, 키세."

  "아, 그런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자각하지 못 했을 게 뻔한 표정으로 키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아. 자주 보던 행동이었는데도 미도리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안경을 조금 올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질문이 무엇이었냐는 거다. 그새 다시 질문하는 것을 잊기라도 한 건지 웃고만 있는 키세에게 다시 물은 미도리마는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그거, 오늘의 행운 아이템인가 그거예요?"

  "할 질문이 없다면 가보고 싶은데."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진학 희망서, 라고 할까. 그거."


  자신이 받았던 종이에 대한 적당한 명칭을 찾지 못한 듯 키세는 뒤를 얼버무리면서 대답했다. 진학하고 싶은 고등학교를 적어서 내는 조사서를 이야기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걸 냈던가. 아직 낸 기억은 없었다.


  "사실 우리는 조금 다르잖아요."


뭐가 다르다는 거지. 그렇게 물으려다 미도리마는 멈칫했다. 그리고는 그냥 말로 꺼내지 않는 쪽을 택했다. 원하면 무조건 그 쪽에 갈 수 있다는 뜻인가. 그거야 그 학교에서 원하기 때문이겠지. 그의 말대로 다른 건 사실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시험을 봐야하는 것이 정상이니까.


  "미도리맛치는 정했어요?"

  "너는 정했냐는 것이다."

  "응. 여러 군데에서 오라고 했지만…… 역시 카이조 쪽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런가."


  굳이 어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학교 이름까지 말해주는 것이 키세답다면 키세다운 대답이었다. 미도리마는 작게 끄덕였다. 쿠로콧치는 어디에 가는 걸까요? 이어진 키세의 질문에는 그저 고개를 살살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할 말이 그게 끝이면 나는 가보겠다는 것이다. 앗, 잠깐만요. 미도리맛치!


  쿠로코. 교실에 돌아온 미도리마는 키세가 말한 이름을 잠시 되새기면서 눈을 감았다. 곧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다시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키세는 쿠로코를 잘 따랐으니까 궁금해 하는 것이겠지. 그게 아니라도 금방 자신에게 물은 것처럼 모두에게 묻고 다닐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농구부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별로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디에 가는가, 인가……."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교실의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책상 위에는 금방 키세가 말한 종이가 올려져 있었다. 미도리마에게도 오라고 권유한 학교는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 마음에 든 학교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정해도 괜찮은 걸까? 이상하게도 자꾸 한 질문이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과연 그 학교에 가도. 이렇게 정해버려도.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 역시 있었다. 무엇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걸까. 무엇이.



  "미도리마, 들었어."


  아카시는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무엇을 들었냐고 물으려다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웃을 뿐이었다. 놀리는 것인가? 아니, 전혀 아니야.


  "슈토쿠로 결정했다며?"

  "……!"


  아카시의 물음에 미도리마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 말하고 싶은 표정 같았다. 그것 역시 아카시는 예상했다는 듯 후후 소리 내어 웃었다. 미도리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권유를 받은 학교들 중에서도 마음에 들었던 곳, 그리고 과연 그걸로 간단하게 정해버려도 괜찮을까 고민했던 곳. 아카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떤 루트로든 아카시의 귀에는 들어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슈토쿠…… 도쿄의 3왕자인가. 네게 어울리는 학교네, 미도리마."


  내게 어울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호칭은 아카시에게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카시가 자신보다 왕자니 뭐니 하는 호칭에 어울린다고. 미도리마는 움찔거리며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한 번 당황함을 내비친 표정은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키세라면 간단하게 가면을 쓰듯 동요 같은 건 감춰버릴 텐데. 한순간이었지만 키세의 능력이 부러워졌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왜 이렇게 그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없는 걸까. 왜,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인지, 어째서 그에게서 그 이름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것을 잘 모르겠다. 계속 고민하고 있던 것과 같은 이유? 그것을 깨달았던 건 아카시의 다음 말이 나왔을 때였다.


  "나도, 미도리마와 같이 슈토쿠로 갈까."


  아카시의 말은, 반쯤 장난 같았지만. 그 반을 장난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진심을 담은 것 같았다. 미도리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미도리마는 진심으로 그것이 진심이길 바랐다. 고민의 원인, 어쩌면 혼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에는 조금 덜 차는 곳이라도 아카시와 같은 곳이라면 그것도 좋다고, 그런 생각이 마음 속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혼자 결정해버려도 좋은가, 라고 생각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납득이 되었다.


  미도리마와 같은 곳으로 갈까. 그가 먼저 그것을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꺼낼 생각도, 용기도 없었다. 아카시, 너는 또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군.


  네 말이 진심이라면. 네가 정말 이 곳을 골라준다면.

  그래서, 다음 3년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의 말을 듣고서 느낀 것은, 기대에 가까웠다.




  방학이 다가오면 학생들은 들뜨는 법이다. 앞에도 말했듯이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3학년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단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학년이나 학교를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즐거운 사항인 것은 틀림없었다. 물론 즐거운 방학, 마냥 놀지 못하고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하는 학생들이 더 많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시험 같은 것이 예외인 몇 그룹에 속하는 미도리마는 방학을 조금 앞두고 가려고 생각해 둔 학교의 이름을 다시 적어서 제출했다. 학생들이 어느 학교를 가는지 파악하기 위한 학교 측의 마지막 설문 비슷한, 그런 것이었다. 예전에 제출한 것과 변동사항이 없다고 해도 내달라고 했고, 그저 학교 이름을 적어서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간단하게 적어서 냈다. 물론 학교 측에서는 미도리마를 포함한 기적의 세대들이 어느 학교로 진학할지 꽤 관심을 모으고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그런 것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슈토쿠秀徳 고교.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했고, 꽤 마음에 들기도 한 학교다. 농구로는 유명한 학교. 그리고 아카시가 고려해보겠다고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카시의 최종 결정은 아직 모른다. 과연 이것을 물어보러 가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을 하던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반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아카시가 슈토쿠를 선택했을 거라고 반쯤 확신해 버려서, 조금 들떠 있었던 것도 같다.



  아카시의 교실은 미도리마의 교실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한 학년에 그렇게 많은 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시끌시끌한 복도를 걸으면서 낯익은 얼굴들도 몇 명 지나쳤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카시는 교실에 없었다. 늘 함께 앉아서 장기를 두던 창가의 자리. 아카시의 자리에는 아무도 없는 빈 책상만이 있었다. 그의 교실은 소란스럽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의 자리가 텅 빈 것을 확인하니 어쩐지 교실 전체가 텅 비어버린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간에 교실에 없다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에게 불려 교무실에 갔을 수도 있고, 복도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고, 그 외의 장소에 있을 수도 있었다. 미도리마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다시 움직였다.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부실을 향해 걷고 있었다.


  부실이라, 얼마만이지. 그러고 생각해보면 오랜 기간 동안 부실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쿠로코가 모습을 감춘 뒤부터였던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한 명 한 명 부실이나 체육관에 발길을 끊기 시작했다. 그래도 부주장이라는 직책상 꽤 오래까지 남아 있었는데도 이렇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머지는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중학교 3년의 대부분의 추억이 있는 장소일 텐데. 사실은 꼭 오늘이 아니라도,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은 다시 가보고 싶기는 했다.


  자물쇠가 보이지 않았다. 원래라면 지금은 정규 수업 시간이기 때문에 부실에 누가 있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자유로이 올 수는 있었지만, 이런 시기에 누가 올 것인가. 부실 문이 당연히 늘 보던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겠지 생각하고 열쇠를 찾으려던 미도리마는 문 앞에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자물쇠가 없다는 건 누가 이 문을 열었다는 뜻이고, 그건 결국 이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감독인가? 아니면 코치? 그들이 아무도 없는 부실에 올 일이 있을 리는 없다. 뭔가 놔두고 간 것이 있는 부원? 차라리 그 쪽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멋대로 추측하는 것을 관두고 미도리마는 직접 그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추측하느라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게 가장 확실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낯익고, 당연했던 것이고, 몇 번이나 봤던 풍경이 새삼스럽게 보이는 기분은 묘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게 이런 건가. 오래 보지 않았더니 마음에서도 멀어져 버렸나보다.


  문은 가볍게 열렸고, 눈앞에는 익숙했던 풍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에는, 익숙한 사람도 그림처럼 함께 녹아들어가 있었다.


  "미도리마?"


  그리고 그 사람은, 찾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아카시를 발견한 미도리마는 놀란 듯 그에게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는 미도리마야 말로 여기 왜 온 거야? 반박하듯 되묻는 아카시의 말에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 왜 왔는지는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그냥 발길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한 것이었으니까.


  "뭐, 됐어. 교실은 너무 시끄러워서. 조용히 있고 싶었거든."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해주고 아카시는 그가 늘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 앉았다. 여기는 조용해서 좋다고, 웃으며 말하더니 미도리마에게 자신의 옆 자리를 권유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순순히 그의 옆에 앉으며 미도리마는 물었다.


  "뭘 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그냥."


  애매한 대답을 하고 아카시는 기지개를 쭉 폈다. 딱히 한 일은 없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아카시의 대답을 이해한 듯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와 보는 부실, 둘 밖에 없어 조용한 공간. 그리고 찾고 있던 아카시까지. 다 좋았다. 단 하나, 아카시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제외하면.


  딱히 억지로 보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도 어느새 잊어버린 채였다. 아카시가 그 때, 그 종이를 떨어뜨리지만 않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아카시가 그것 떨어뜨린 것이 일부러였는지, 정말로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팔랑, 하고 종이가 바닥에 떨어져 옆에 앉아있던 미도리마는 그것을 주워 아카시에게 주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종이의 내용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아카시 세이쥬로. 그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라쿠잔洛山 고교. 그것은 낯선 학교의 이름이었다.

  멋대로 했던 기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미도리마."


  종이를 본 것을 알았는지, 아카시가 먼저 미도리마를 불렀다.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아카시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미도리마, 뭘 기대했던 거야. 기대가 깨졌다는 표정을 짓고 있잖아.


  그 말대로다. 나는 아카시에게 대체 뭘 기대했던 거지? 미도리마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아무도 그것이 확정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왜 자신은 멋대로 그걸 확정짓고 멋대로 기대한 거지? 여태 생각했던 것이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카시."


  하지만 왜, 너는 그것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속으로만 그에게 묻고 싶었을 터인 말이, 자신도 모르게 말의 형태로 그에게 내어졌다. 왜. 왜 같은 곳을 선택해 주지 않았냐는 것이다. 아카시. 어째서. 그것은 전제가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그것을 느낄 틈은 없었다. 미도리마. 아카시는 한숨을 쉬었다.


  "신타로."


  순간 귀가 잘못 된 줄 알았다. 아카시가 부를 사람은 적어도 이 안에선 한 명 밖에 없는데.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을 불러주는 건 아마도 처음. 지금까지는 쭉 성으로만 불러주었으니까.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생소하게 들릴 수 있나 생각하며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왜 갑자기 이름을 불러줬을까 같은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도리마를 보는 아카시의 눈빛은 단호했다. 네가 바랐던 것, 멋대로 기대했던 것. 그건 전부 네 어리광이야. 이제 그런 어리광은 통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하는 말은 장난이 아닌 진심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적이야."


  그 말은 조금,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몇년 전 책이기도 하고... 극장판 기념으로 공개.

너무 오래 전에 써서 부끄럽습니다... 이거 썼을때가 완결 1년전쯤이군요...

원작에서도 이래저래 공개되지 않은 것도 있던 때니까 틀린 설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정도 감안하고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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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적] 三月雨

2016. 1. 12. 01:31 | Posted by 에클레아

 혼자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라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사람도 많고 소란스러운 거리에서 여자의 작은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었다. 누가 내게 말을 했던 것 같다고 깨닫고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사람들 사이에 밀려 아는 얼굴을 놓친 뒤였다. 끊임없이 밀려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자신에게 말을 했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곤란하지 않을까. 여기서 집을 찾아가지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자신은 괜찮겠지만, 데리고 나온 하인의 입장에서는 곤란할 게 분명했다. 여기 계속 서있다 보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터벅터벅 걷다가, 어느새 주위의 사람이 적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잘 모르는 곳에 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섣불리 다시 어디론가 가다가는 더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가만히 서있는 게 최선이거나, 누구라도 사람을 찾아 물어보는 게 먼저다. 작은 소년은 길 한가운데 멈춰 섰다.

 대체 어디서 어디로 들어오면,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올 수 있는걸까.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쯤에, 주위의 나무 뒤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많이 사는 마을이다. 커다란 산짐승 같은 것이 갑자기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테지. 그렇다면 여기서 큰길로 나가는 방법을 물어보자. 그러면 아까 헤어진 사람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혹시나 저 뒤에 있는 것이 토끼같은 작은 짐승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일단 확인하고나서 생각하면 된다.

 소년은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옮겨 나무 가까이에 다가갔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무 뒤에서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좋을텐데. 소리가 나는 쪽에 가까이 가서 보니 누군가 있었다.
 아니,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 그의 붉은색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는 순간 사람이 아닌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쓸데없는 생각일테니 곧 잊어버렸다. 그럼 저것이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붉은색 눈동자,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 자신의 머리카락도 꽤나 특이한 색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태 저런 색의 머리카락은 본 적이 없다. 선명한 붉은색의 머리카락이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사람을 경계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도 않았다. 한참을 서로 바라보고만 있다가, 소년은 먼저 하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잠시 눈을 깜박이던 그가 대답을 하려 입을 열었을 때는, 사람의 것이 아닌 언어가 나올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이 현실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당연하게도.

 "하필이면 사람도 잘 오지 않는 곳에…… 길을 잃은 모양이네."

 그는 짧게 감상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길을 가르쳐주었다. 조금 더 큰 키, 그리고 묘한 분위기나 표정, 얼굴. 그를 잠시 살펴보던 소년은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판단했다. 그렇겠지. 아직 자신은 어리니까. 소년은 그에게 감사를 표하려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서 가봐. 누군가 널 찾고 있을 거야.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누군가 찾고 있는 건 맞겠지. 소년은 그가 가르쳐준 길로 가려다 말고 뒤로 돌았다. 본 적이 없는 색의 머리카락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이 지역의 사람이 아닌걸까.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지리를 잘 알고 있는걸까.

 "너는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어디에 살고 있지?"

 다짜고짜 질문이냐고, 그는 되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라는 건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왜 갑자기 그걸 입으로 내어 물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대답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궁금해서, 먼저 질문을 해놓고도 눈치를 보는 소년의 모습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가락으로 나무들이 가득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숲 속."
 "숲 속?"
 "그래. 사람이 닿지 않는 깊은 숲 속."

 숲 속에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쳐도, 뒤의 말이 신경쓰였다. 사람이 닿지 않는. 사람이, 오지 않는. 사람이면서 타인과 섞여 사는 것을 싫어하기라도 하는건가?

 "…… 왜 그런 곳에서 살고 있는 거지?"

 그 질문에 대해 그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게, 그리고 사람을 홀릴 것처럼 웃은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여우니까."
 
 

(중략)

 

 누군가 집에 초대되어 온다는 말을 들었다. 나라에서 이름이 꽤나 알려진 악기 연주자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왜 오냐고 물으려고 했다가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집안에 권력과 재력이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물론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별로 그런 것에 큰 관심은 없었기에 미도리마는 그런가보다, 하고 가볍게 넘겼다. 다만 자신이 그런 것과는 반대로, 집안은 연회라도 열 것 마냥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게 신경 쓰인다면 신경 쓰이는 사항이었다.

 악기라. 어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일까. 아예 관심을 끄려다가 미도리마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려냈다. 어릴 적에 어렴풋이 들었던 악기 소리. 지금도 눈앞에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의, 누군가를 만났던 어릴 적의 밤. 그 소리는 어떤 악기의 소리였는지. 혹시라도 오늘 온다는 그 사람이, 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라면 흥미가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것이 어떤 악기였는지 모르니 직접 연주하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맞는지 아닌지 모르는 게 문제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조금 기대되는 마음으로 미도리마는 기다려보기로 했다.

 아직 저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른, 하지만 해가 지기 시작하는 오후. 손님이 올 시간이 다가와 더 바빠진 집안의 분위기를 뒤로 하고, 미도리마는 자신의 방에 앉아 조용히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분명 책상에 똑바로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지 책상에 엎드려 있었던 것을 보면 그렇다. 잠이 덜 깨서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미도리마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낯익은 소리. 그것은 분명 어릴 적에 들었던 그 소리였다. 그 때는 멀리서 들렸기에 잘 들리지 않았긴 해도 지금 들리는 이것과 어릴 적의 그것이 같은 악기가 내는 소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누가 연주하고 있는 거지? 미도리마는 밖으로 나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별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홀리듯 걸어가니 누군가가 커다란 악기를 자신의 앞에 내려놓고서 연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는 집안의 사람들 외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 한가운데,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사람들에 가려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미도리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던 선명한 붉은색의 머리카락.

 그 사람은 자신의 손끝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하는 듯 눈을 반쯤 감은 채, 능숙하게 줄을 튕기며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2013.06.17
6월 적우온리 녹적 신간 샘플
아카시가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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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적] longing

2016. 1. 12. 01:27 | Posted by 에클레아

 "아카싯치, 나……."
 "참아."
 "그러니까 그것도, 이제 무리라구요……."

 처음부터 이런 녀석을 데려오지 않았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것이 지금, 아카시 세이쥬로의 머리를 문득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하지만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렇게 자신이 잡아두지라도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디서 어떤 짓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아카시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늘 하던 것과 같은 최선의 선택.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 텐데. 분명, 그랬을 텐데.

 흔히들 뱀파이어라고 불리는 그런 것이 실제로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건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거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아마 아카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 상상 속의 괴물이 정말로 있었다면 세상은 이미 엉망이 되었을 거다. 그게 당연한 생각이고, 당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생각이었는데. 그 생각이 깔끔하게 뒤집어 진 것은 어느 밤중의 일이었다. 홀리듯이 이끌려 찾아간 곳에는 반짝이는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키는 꽤 큰 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미인이라고 칭하지 않을까 싶었던 사람.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그러니까 그거. 이 세상에 있을 리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 뱀파이어, 혹은 흡혈귀라고 불리는 종류의. 당연히 그런 어이없는 말을 믿을 생각은 없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재미없는 놀이라면 그만 두라고 말했다. 그는 물론 듣지 않았다. 오히려 달려들려고 했었다. 그 뒤는 어떻게 되었더라. 인간이 아닌 것에게 관여한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과정이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언제부턴가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아카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존재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라는 것을. 이름은 의외로 평범한 인간 같았다. 키세 료타, 라고 그는 말했다. 반짝이는 금발이나, 눈 색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그는 생각보다 얌전했다. 누가 봐도 인간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한 번은 아카시가 먼저 물어 봤었다. 너는 인간의 피 같은 건 먹지 않아? 그는 대답했다. 좋아해요, 그거. 하지만 아카싯치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이상한 대답이었다. 보통 짐승은 무엇보다 욕구를 우선으로 할 텐데. 그는 인간 외의 무언가지만 이성이 조금 더 앞서는 걸까. 약간의 의문이 남았지만 아카시는 그쯤에서 질문은 그만 두기로 했다. 적어도 그는 여차하는 순간에도 대화를 할 여지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가끔 한 번씩 자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정도까지는 괜찮았다. 아직은 아무도 함부로 해치지 않았으니까. 그때까지는.

 "한 번만, 아카싯치……."

 얌전하다고 생각했던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아카시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짐승이 애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와는 어딘가 조금 다르다. 아카시는 반쯤 본능적으로 그걸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위험할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원래는 피를 먹고 살아가야하는 그가 한참동안이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만 해도 굉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해치면 안 돼, 료타. 그것은 인간의 기준에서 한 말이었다. 어쩌면 그 말은, 그에게 있어선 죽으라는 말과 같았던 건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잘 참아왔잖아. 그런 걸로, 여태까지 잘 참았으니 앞으로도 쭉 참아.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나, 정말로 이제 한계예요. 제발……."

 적어도 그런 말을 하면서도 아직까지 달려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직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크지 않은 공간에는 짐승의 낮은 숨소리만이 들렸다. 료타, 나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나를 위해서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 그게 아니라면 너를 위해서 네게 나를 내어줘야 하는 걸까? 이번에는 어느 쪽이 옳은 선택인지 잘 모르겠어. 아니, 어느 쪽이든 내가 선택하는 선택이 옳은 거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대체 뭘 기준으로 그걸 정해야할까. 사실은 하나 후회하고 싶은 게 있어. 너를 왜 데려왔을까, 하고. 그 때 나는 왜 너를 봐버린 걸까, 하고. 그렇지만…… 그러네. 너와 있었던 시간 자체를 전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 너는 네게 꽤나 무서운 짓을 했구나, 료타. 나는 너를 그냥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어.

 "이리 와."
 "아카싯치……?"
 "네가 원하는 건, 이런 거잖아."

 진심이에요? 그래. 나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아니면 이제 와서 그만 두려는 걸까. 그런 거라면 나도 좋지만. ……아니에요. 그저, 아카싯치…… 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거라면 관둬. 이건 내 판단이야. 네게 어떤 말도 들을 이유가 없어.

 그는 잠깐이지만 망설이는 것 같은 행동을 보였다. 그렇게 원하는 얼굴을 했던 주제에 정작 기회가 오니 망설이는 모습이라니 우스웠다. 미안, 해요. 하지 말라고 했던 말에도 굳이 소리를 내어 말하고서 그는 조금씩 다가왔다. 지금이라도 피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이후의 자신은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고민조차 필요 없었다. 그건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테니. 설마 죽기야 하겠어.

 목이 따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파, 그런 말을 할 겨를도 없이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소한 감각이 느껴졌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움직일 힘이 없어서 눈동자만 조금 굴려서 옆을 보면 늘 예쁘다고 생각했던 금발이 보였다. 쉴 새 없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듯한 소리는 물을 마실 때의 소리와 비슷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도 않았는데 현기증이 몰려와 견딜 수가 없었다. 눈앞이 흐릿하고, 정신마저 놓쳐버릴 것 같은 기분에 아카시는 눈을 감았다. 길게 숨을 내쉬고 더 이상 버티는 것을 포기할 쯤에,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나를 용서해요.





2013.02.07
판타지 패러렐. 키세가 뱀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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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황] 交わらないふたつの世界

2016. 1. 12. 01:23 | Posted by 에클레아

01.

 "아얏."

 잠시 따끔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지나갔더라면 눈치 채지 못 했을지도 모르는 작은 아픔이었지만 따끔하다는 생각이 들고나니 곧 그것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손을 뒤집어 보니 손가락 끝에 생긴 긴 상처에서 조금씩 피가 나고 있었다. 아마도 금방 종이에 베인 모양이었다. 애초부터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라 피가 많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피라도 닦아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에 올려진 물건들 중에서 휴지를 찾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키세, 뭐하는 거야. 촬영 시작할 시간인데. 아, 종이에 베여서…… 피만 닦고 갈게요. 새 종이는 생각보다 베이기 쉬우니까. 조심해야지. 알았으니까 피가 멎으면 와. 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당연하게도 피는 금방 멎었다. 약을 바르고 뭐라도 붙일까 했지만 곧 있을 촬영에서 눈에 띄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일단은 그 뒤의 일로 미뤄두기로 했다. 촬영 중에 다시 피가 나지만 않는다면 상관없을 일이었다. 촬영은 다행히도 금방 끝났고, 상처에 대해서도 잊을 쯤에 아까의 매니저가 약과 밴드를 가져왔다. 일일히 신경 안 써줘도 괜찮은데.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농구한다며? 손가락이 아파서야 공이나 제대로 잡겠니. 키세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그건 그렇네요, 하고 같이 웃었다. 그리고 그 상처에 대한 것은 잊어버렸다.

 ……고 생각했다. 별 것도 아닌 작은 그 상처는 의외로 많은 사람의 눈에 띈 듯 했다. 같은 반인 여학생들부터 시작해서 주위의 사람들까지도. 어디 다쳤어? 그렇게 물어오면 키세는 늘 같은 대답을 했다. 별 거 아니에요. 종이에 베였을 뿐인걸요. 보통은 그렇게 대답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기 때문에 다른 대답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도 그거지만, 정말로 놀랐던 것은 방과 후의 부활동 시간이었다. 늘 그렇듯이 개인적으로 지시해주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키세에게 와서는 대뜸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누구냐면, 아오미네 다이키가. 아무래도 시선이 향한 곳을 보니 손가락 끝의 상처를 말한 것이었던 것 같다. 뜬금없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키세는 눈을 깜박였다.

 "네?"
 "그거 뭐냐고. 손가락에 그거."
 "아, 이거라면…… 어제 종이에 베인 거예요. 별 거 아니에요."
 "칠칠맞기는."

 에? 몇 번씩 반복해서 했던 대답을 이번에도 반복했더니 그는 걱정된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것뿐이었지 그 이상의 말이나 행동은 없었다. 쯧, 하는 소리를 내며 아오미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연습을 시작하고 나서도 키세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금방 뭐라고 했지?

 아오미네 다이키. 테이코의 에이스, 그리고 처음부터 늘 동경했던 사람. 키세 료타에게 있어서 아오미네는 꽤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키세에게 한정된 이야기로, 아오미네는 그다지 키세에게 관심이 없는 듯 했었다. 먼저 1on1을 해달라고 조르는 건 키세였고, 아오미네가 먼저 말을 거는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그는 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다. 처음으로 여기에 들어왔을 때 키세 자신의 교육담당이었던 쿠로코 테츠야. 그 둘은 빛과 그림자 같은 관계라고 했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분하지만. 아오미네의 시선은 늘 쿠로코를 향해있었고, 쿠로코의 시선 또한 아오미네를 향할 때가 많았다. 자신이 끼어들 공간 같은 건 없어보였고, 키세도 그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어서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그 아오미네가. 웬만한 일에는 자신에게 요만큼의 관심조차 주지 않던 아오미네가. 키세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멍하니 아오미네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 끝의 상처가 다시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02.

 출처를 알 수 없는 키세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처음에는 손 끝에만 작은 상처가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 상처가 나아서 사라질 즈음에는 또 다른 손가락에 상처가 생겼다. 이번에는 종이 같은 것에 베인 상처는 아니었다. 손가락 정도야 조금만 실수하면 얼마든지 다칠 수 있는 데다가, 그다지 크거나 심각한 상처도 아니었기에 처음처럼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그렇게 손가락에 몇 개의 상처가 생기고 사라진 후에 키세는 손목에 붕대를 감고왔다. 빙판길에 미끄러졌는데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짚었다가 손목을 삐끗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멍청하게 뭐하는 짓이냐는 아오미네의 말에 왼손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하는 말을 키세는 변명하듯 웃으며 덧붙여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왼손이라고는 해도 공을 자유로이 다룰 수는 없었기에 당연히 연습은 잠시 쉬게 되었다.

 손목이 괜찮아질 때까지 연습은 잠시 쉬도록 해. 무리하면 더 상태가 악화되니까. 아카시의 반쯤 명령에 가까운 말을 듣고서도 키세는 꼬박꼬박 체육관에 얼굴을 비췄다.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날마다  나와서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다른 부원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하루 일과라도 된 것처럼. 아니면 연습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기라도 한 건지 자신의 옆으로 데구르르 굴러오는 공은 괜히 한 번 던져보기도 했다. 그 때마다 손목이 아프다며 인상을 찡그리고 징징대기도 했지만. 그리고 하나 더, 올 때마다 또 다시 작은 상처들이 하나씩 늘어있었다. 걱정이 된 쿠로코가 또 어딜 다친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키세 본인은 늘 촬영장에서의 실수때문이라고만 답했기에 아무도 그 이상 물어보지는 못했다.

 의외로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기간은 꽤 길었다. 한 번은 아카시가 먼저 키세에게 와서 상태를 보고 싶으니 잠시 붕대를 풀어달라고 했었다. 키세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고, 아카싯치라면 상관없겠죠! 라는 말을 하며 손목에 감겨있던 새하얀 붕대를 풀었다. 다 풀어낸 붕대가 바닥에 떨어지고 드러난 손목에는 붕대를 감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새파란 멍이 보란듯이 있었다. 아카시의 근처에서 관심 없다는 표정을 하고 옆에서 지켜보던 아오미네는 그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게 뭔지 설명해봐, 키세. 깜박했다, 이런 게 있었죠. 그게, 며칠 전에 집에 있다가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지 뭐예요. 평소처럼 웃는 표정에 거짓같은 건 섞여있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라, 아오미넷치."

 부활동이 끝나고나서의 하교길에 낯익은 목소리에 아오미네는 걸음을 멈추었다. 먼저 아는 척을 하며 다가오는 노란색의 인영은 아까 체육관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게 손목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아까 봤던 새파란 멍이 생각났는지 아오미네는 키세의 손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냐."
 "무슨 일이라뇨?"
 "상처말야. 어디서 맞고 다니냐고. 아니, 만약의 이야기지만. 실수를 그렇게 많이…… 아, 몰라. 됐어. 조심하라고."

 가다가 또 다치지 말고.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지만 아오미네는 대충 얼버무리듯이 끝을 맺었다. 그리고는 먼저 손을 흔들며 잘 가라는 형식적인 인사를 남기고서 먼저 가버렸다. 쫓아가는 것도 잊었는지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키세는 눈을 깜박였다. 조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표정이었고, 조금은 묘한 성취감이 담긴 표정이었다. 아오미네에게서 먼저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키세는 아오미네에게는 들리지 않을 것을 알고서 작게 속삭였다. ……아오미넷치는 상냥하네요.





2013.01.29
부산온리 청황 신간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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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황] 泣いたのは誰のせいで

2016. 1. 12. 01:19 | Posted by 에클레아

 "비오는 날이면 생각나는 게 있어요."
 "……하?"

 빗방울이 가볍게 창문을 때리는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 어떤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 말에 대한 보충설명을 뒤에 덧붙여 준 것도 아니었으니까. 앞뒤도 없는 뜬금없는 말에 아오미네 다이키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말을 꺼낸 키세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깜박이며 창문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고 있었지만. 톡톡, 톡. 마치 무슨 신호를 입력하듯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에 맞춰 두드리는 그 소리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그 말의 뒷내용일까. 하지만 단조로운 소리의 나열로 숨은 뜻 같은 걸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당연하잖아.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하고 있으면 상처받을지도."

 헛소리. 헛소리라면 집어치우라고 하려다가 아오미네는 입을 다물었다. 창 유리에 살짝 키세의 표정이 비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거울이 아니니 선명하지는 않지만, 조금. 반쯤 감고 있는 눈은 창 너머의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히 그가 보고 있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보았지만 별로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저렇게 그리운 것 같은 눈을 하고서 계속 쳐다보고 있을만한 건.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아니, 아무것도 보고있지 않았어요. 변명하는듯한 말을 하고서 키세는 고개를 저었다. 톡톡 치던 손동작을 멈추고 돌아서서는 어깨를 으쓱이고서 살짝 고개를 기울여 눈웃음을 짓는 표정은 그가 자주 써먹는 방법이었다. 키세는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아오미네가 딱히 뭐라고 반박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실제로도 늘 그랬고, 한 번도 그렇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아오미네는 딱히 더 묻지 않고 헛기침을 몇 번 하며 탁자에 손을 짚고 일어났을 뿐, 한껏 불만인 표정을 하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정말 기억 안 나요?"

 기억이 안 나? 아오미네는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기억이 안 나냐고 물었다는 건 뭔가 관련이 있거나, 자신도 알고 있는 일인 것이 분명한데도 딱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비오는 날에 생각나는 일. 뭔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일. 그런 게 있었으면 잊었을 리가 없을텐데. 힐끗 키세의 눈치를 봤지만 딱히 실망한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대답을 기대하는 말이 아닌가? 아니면, 그냥 해본 장난같은 그런 말인가?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카시라면 모를까, 딱히 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알아내는 재주도 전혀 없었으므로. 아오미네의 기억 안 난다는 말을 듣고도 키세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리고 그게 더 아오미네를 혼란스럽게 했고.

 "그 때도 비가 오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정확히는 약간 흐린 하늘이었는데 정신차려보니 비가 오고 있었죠. 딱 오늘같은 날씨네요. 하늘도, 기분도 비슷해요. 그리고 내 옆에 같은 사람이 있고……."

 그리운 옛 이야기를 하듯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키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일어서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의 살짝 감은 눈의 속눈썹이 생각보다 더 길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원래 일반적인 경우보다 조금 더 긴 편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쁘게 접힌 눈 모양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어떻게 보냐에 따라서는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었다. 톡톡, 그가 굳이 손으로 치지 않아도 빗방울은 계속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옆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요."

 옆에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거였는데. 얼떨결에 내 바람을 말해버렸네요. 그게 무슨 날이었더라. 아, 맞아. 내가 아오미넷치한테 졌던 날이었는데. 중학교 때요. 어…… 그러고보니 진 적 밖에 없었던가. 어쨌든 그 중에 하루였어요. 늘 그랬지만 이번에는 꼭 이겨보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했었는데 처참하게 깨졌죠. 그냥 늘 있는 이야기네요.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음. 내 귀에 있는 이거, 아오미넷치랑 같은 색인건 알죠? 한쪽 뿐이지만. 갑자기 무슨 말이냐니,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요. 어라, 화내지 말아요. 장난이라구요. 장난.

 키세는 혼자서 계속해서 눈을 깜박이기도 했다가, 웃기도 했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혼자 말을 이어나갔다. 끼어들 타이밍이 없기도 했지만 굳이 끼어들 생각도 없었다. 할 말이 있어야 끼어들던가 하지, 하고 작게 중얼거리며 아오미네는 그가 말한 피어싱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보니 파란색이었지, 저거. 언제부터 하고 있었더라. 왜 한쪽만 하고 있는건지는 모르겠고. 키세의 말도 끊겼고,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다가 아무 생각없이 손을 뻗어 귀를 건드렸더니 그는 놀란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살짝 틀었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라 아오미네 스스로도 놀랐는지 금방 손을 내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응시했다.

 "미, 미안하다. 딴 생각을 하다가."
 "아뇨, 그냥 놀랐을 뿐이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며 키세는 아오미네의 손이 닿았던 쪽을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들었지만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인 감촉이라 별 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아프다는 느낌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다. 잠깐이었지만 아오미네는 그걸 놓치지 않았는지 괜찮냐고 물었고, 키세는 괜찮다고 답했다. 이제는 이걸 하고 있다는 것도 까먹을 정도인데 가끔씩 아플 때가 있어요. 그리고는 조금 눈물이 나요. 아파서 우는 건 아닌데, 그냥 눈물이 나요. 아, 이제 이 이야기를 한 이유가 기억났어요.

 그거 알아요? 나 여기 상처낸 적이 있었는데. 아오미넷치한테 지고나서, 그건 흔한 일이지만 그 날은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건지, 뭐였던건지…… 이걸 손으로 억지로 뜯어버리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귓볼이 떨어져나갈 뻔 했다니까요. 피도 나고, 엄청 아팠는데, 그 쯤에서 관뒀어요. 왜였을까요? 아파서 그랬던걸까요. 아마도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아파서 그랬던 거라면 처음부터 그런 짓은 안 했을 거예요. 응, 맞아요. 아오미넷치가 생각났거든요. 아오미넷치 색이니까. 그러고나니까 갑자기 너무 울고 싶어져서, 그 자리에 앉아서 꽤 오래 울었어요. 져서 분하다기 보다는, ……말로는 설명 못 하겠네요. 한참을 울고 교실로 잠시 갔었는데, 복도에서 아오미넷치를 만났어요. 기억나요? 울었던 게 들킬까봐 고개 숙이고 바쁜 척 인사만 하고 지나갔었는데.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비가 왔었어요. 교실에 있을 때만 해도 오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그때부터예요. 가끔씩 아프게 된 거. 그리고 방금도.

 "……멍청하긴."
 "너무해라."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그걸 잡아뜯긴 왜 잡아뜯어?"
 "그러니까 그걸…… 아니, 아니에요."

 그런 말은 됐으니까 한 번만 안아줘요. 팔을 벌리고 당연하다는 양 요구를 해오는 그의 표정은 웃고있었지만 어딘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 아오미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말했던 중학교 때의 그 날처럼. 다른 게 있다면, 이제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는 점일까.





201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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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적] たったひとつの触れる方法

2016. 1. 12. 01:13 | Posted by 에클레아
 "미도리마는 어디 갔어?"

 방에 들어오자마자 아카시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 방 안의 인원을 체크했다는건가 놀랄 새도 없이, 한참 제 이불을 정리하던 쿠로코가 살짝 손을 들었다. 미도리마 군이라면 아까 밖에 나가는 것 같았는데요. 어, 봤으면 말렸어야지ㅡ. 내가 찾아올까, 아카칭? 아니, 됐어. 내가 찾아올테니까 너희는 어서 자도록 해. 둘뿐만 아니라 나머지도.

 굳이 다른 사람을 시킬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건지 아카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나가려다말고 간단히 다음날의 일정에 대한 설명을 했다. 물론 열심히 듣는 것은 쿠로코 정도이고, 나머지는 듣는둥 마는중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다음날이 되면 싫어도 다 알게 될거고. 잘 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카시는 방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갔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찾는다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진한 녹색의 특이한 머리색이나 큰 키덕분에 금반 찾을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묘하게 있었다. 게다가 그의 성격상 근처에 머물러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그가 자야할 시간에 다른 곳에 갔다는 것은 조금, 놀라운 일이었지만.

 "미도리마!"

 예상대로 그는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숙소 바로 앞에 있는 바닷가,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에 그는 혼자서 덩그러니 서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아카시가 제 이름을 부르자 미도리마는 놀란 기색을 보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낯익은 붉은색 머리가 아카시의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카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정말로 눈치채지 못했을지는, 알 수 없다.

 "잘 시간이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설마 머리도 좋은 네가 잊은건 아니겠지."
 "……그냥 바람이 쐬고 싶었던 것이다. 조금 있다 들어갈테니 먼저 자라, 아카시."

 미도리마는 할 말만 하고는 아카시에게 등을 보였다. 그것도 혼자 있고 싶으니 가라는 듯한 말을 하고서. 그리고 바람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치는 소리도 들렸다. 한참을 듣고 있어도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는 커녕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은 그런 소리. 가만히 듣고 있던 아카시는 그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사박사박거리는 모래 밟는 소리가 이상하게도 크게 울렸다. 미도리마는 여전히 바다 쪽을 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옆에 가서 한참을 올려다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자, 아카시는 입을 열었다. 네가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나는 너희를 모두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어. 신타로, 네가 아무리 부주장이라고는 해도 부원을 혼자 놔둘 수는 없지.

 요컨대, 나는 너를 데리고 돌아가야한다, 라는 아카시의 말에 미도리마는 그제서야 그가 자신의 바로 옆까지 와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뒷걸음질 치지 않은걸 칭찬해주고 싶은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제 옆에 다가오는 것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던걸까. 슛의 터치에 신경쓸 정도로 예민한 그가. 생각하면 할수록 오늘 밤의 그의 행동은 확실히 평소와 달리 조금씩 이상했다. 사람이 늘 같을 수는 없고, 조금 다른 날도 하루 정도야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상한 것은 이상한 거였다.

 "내가 있으면 안되는거야?"
 "그,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마음대로 해."

 그럼 왜 말을 더듬고 그래, 신타로답지 않게. 어느새 미도리마에서 신타로로 호칭이 바뀌어 있었지만 두 사람 중 어느 하나도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늘 그랬으니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아카시는 둘만 있을 때면 꼭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예를 들자면 부활동도 모두 끝난 방과후, 교실에서 단 둘이 앉아 장기를 둘 때라던가. 언제부턴가 그것에 익숙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반대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를 이름으로 불렀던 적은, 단 한 번도. 아카시가 그것에 불만을 표한 적도, 아마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사람과 있을 때도 그러는건가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은 있었지만 굳이 물어볼 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러려니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문득 그것이 다시 궁금해졌다. 쓸데없는 마음의 변화다.

 "맞아, 신타로. 아까 손 다쳤지? 보여줘봐."

 깜박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아카시에게서 미도리마는 눈을 돌렸다. 그런 표정으로 본다고 해봤자, 그가 뭔가를 깜박 잊는다는 일 같은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에. 말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손, 보여달라니까. 다시 한 번 같은 요구를 해오는 아카시에 미도리마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물론 아카시 또한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손 보여줘, 신타로.

 "별거 아닌 것이다. 네가 신경 쓸 정도는……."
 "중요해. 너는 팀의 소중한 득점원이잖아? 조금이라도 다쳐서는 곤란해."

 그래, 잠깐 잊고 있었다. 제 아무리 거부해도 아카시의 완고한 자세에는 어떻게 해서도 이길 수 없었다. 항상 그래놓고도 잊고 있었던걸까. 그의 계속 되는 요구에 미도리마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말대로 손을 내밀었다. 손톱의 관리를 위해 늘 테이핑을 하고 다니는 손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테이핑을 해두면 내가 볼 수가 없잖아, 하고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내민 손을 잡았다. 풀어낼 생각이었겠지. 별 것 아닌 그 행동에, 미도리마는 작게 숨을 삼켰다.

 정말 농구를 하는 사람의 손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격차가 있으니 아카시의 손이 자신의 손에 비해 작은 것은 당연한 일일텐데도, 그 당연함 같은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손을 잡힌 정도로. 그런 미도리마의 생각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아카시는 그의 손의 테이핑을 푸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미도리마는 차라리 내가 푸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아카시에게 말했지만 그는 들어주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감긴 것을 풀어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차라리 빨리 끝나버렸으면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너무도 천천히 풀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키 차이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다 볼 수 밖에 없는 그 얼굴이, 무언가에 열중하는 표정이, 닿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없게 해. 차라리 안 보면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서도 도저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아직은 중학생, 평균의 중학생보다는 키가 큰 편이라고 해도 자신보다 한참 작은 키와 앳된 얼굴이 너무도 신경이 쓰였다. 일부러 밖에 나와있었는데. 너는 어째서 나를 찾으러 온 것인가, 아카시. 그에게든, 누구에게든, 책임을 돌리고 싶었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까, 불안해서 괜히 이를 악물었다.

 "다행이야,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닌 것 같네. 하지만 그렇다고는해도 악화되면 안 되니까 내일 연습은 쉬는게 좋겠어."

 어느새 테이핑을 다 풀어내고 손을 이리저리 살피던 아카시는 그런 감상을 내놓았다. 안 된다. 더 이상 말하지마. 목소리, 들으면 안 될것 같은 것이다. 혼란스러워져버린 머리로 같은 것을 계속 생각해봤자 아카시에게 그것이 들릴 리는 없었다. 제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는 확인하듯 되물었다. 신타로? 듣고있어? 그리고는 미도리마의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보는 그 각도가, 마치. 그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미도리마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카시는 드물게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 물러서."

 아, 저것은 그가 화를 낼 때의 표정이다. 아카시도 저렇게 당황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건가 생각할 틈도 없이 미도리마는 그의 손에 의해 밀려났다. 자신이 한 행동이지만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였지. 방금 그건 대체 뭐였던거지. 그런데 어째선지 미안, 이라고 하는 간단한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미도리마를 아카시는 노려보듯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쳐다보고 있는 것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라고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어째서 이 와중에도 그는, 아카시 세이쥬로는, 화내는 모습조차도 아름다운 것인가. 내가 잘못했다, 아카시. 그런 말을 하며 자신이 금방 한 행동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번만 더, 그 당황한 표정이 보고싶었다. 어느새 어딘가 이상한 쪽으로 변질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카시. 뭐라도 입 밖에 내면 조금은 달라질까 싶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카시 세이쥬로는 여전히 미도리마 신타로를 상냥한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만 두라고 말했어. 이건 명령이야, 신타로.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아카시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하고 싶었던 말일 뿐 그것이 끝까지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자의로 관둔 것인지, 타의로 관둘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미도리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카시의 어개를 잡아끌었다. 그만두라고 하지마라. 이번만은 너의 명령을 어길 것이다, 아카시. 나는, 나중에 네가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본다고 해도 나는. 이번에는 아까처럼 금방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 기회같은 것은 없을게 뻔하기에. 그러니까, 기회가 왔을 때.

 처음에, 말과는 달리 아카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당황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포기했던 것일까. 이대로 맞붙은 입술을 떼면 아카시가 자신은 한없이 경멸하는 눈으로 보고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상냥하게 웃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름으로도, 불러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이 잠시 두려워져서, 그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조금 떨렸다. 아주, 조금. 하지만 그리고나서 든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어차피 미움받게 될 거라고 한다면. 이미 저지른 일을 없던 일로 되돌릴 수 없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지금은 그에게 뭘 하든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에 다른 생각이 들었을 때, 아카시는 묘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나마도 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게 틀림 없었다. 놔. 놔, 신타로. 아마도 그가 지금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자신은 수십번이고 그런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 말은 듣고싶지 않으니까, 그의 뒷머리를 잡고 끌어당겼다. 그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같은건 없었다. 꿈 속. 그래, 마치 꿈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미도리마 신타로가 아카시 세이쥬로와 키스하고 있는 꿈. 하지만 손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머리칼이, 섞어낸 혀의 감촉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이 모든 것들이 이것은 절대로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제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것이 꿈이면 어떻고, 또 현실이면 어떻지? 그게 전부 어쨌다는거냐.

 "하…… 신, 타로……."

 드물게도 아카시는 숨이 찬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연습할때를 제외하면 저런 적이 있었던가. 잠시 생각해봤지만 분명 제 기억에는 그런 적이 없었다. 아아. 그런 결론이 나오자 이상하게도 묘한 성취감이 들었다. 늘 위에 있다는 느낌만을 주던 그가, 자신의 아래에 있는 것 같은 기분. 단순한 착각이라도, 잠깐뿐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생각이 깨진 것은 그에게 밀려났을 때도 아니었고, 그가 경멸하는 눈은 커녕 무심한 듯한 눈으로 쳐다봤을 때도 아니었다. 아카시는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등으로 제 입술을 닦고, 그리고는 그저 눈 앞에는 아무도 없다는 듯한 눈을 하고, 뒤돌았을 뿐이다. 겨우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도.

 "먼저 들어가겠어. 너는 거기서 머리를 좀 식히고 오는게 좋겠네. 늦지 않게 들어와."

 냉정하게 돌아서는 그에게서 그런 말을 듣고서야, 뒤늦게 밀려오는 자책감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그를 잡는 것도. 심지어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내가 미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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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흑] The Little Mermaid

2016. 1. 12. 01:08 | Posted by 에클레아

 한밤중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그다지 반가운 소리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밀려있는 일 때문에 일찍 자지도 못하고 늦게까지 깨어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런 날에는 특히나 더.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슬리는 그 소리는 도저히 멈출줄을 몰랐다. 설마하니 경찰 집에 쳐들어오는 멍청한 도둑일리는 없고, 어디 부엌쪽에 창문이라도 열어둔걸까. 서재와 부엌은 바로 붙어있는 것도 아니건만 소리가 이렇게 크게 울린다는건 집이 그만큼 조용하다는 뜻일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이 조용한데서 일을 좀 해보려고 했던건데 말이지……. 그 소리가 멈춘 것은 더 듣고 있다가는 일을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일어나 문을 닫으러 가려고 했을쯤이었다. 그리고 대신 탁, 하고 탁자에 뭔가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바쁘다면서 일어나서 돌아다닐 여유도 있는겁니까? 아오미네 군."
 "뭐야, 테츠. 안 자고 있었냐."
 "아까부터 쭉 일어나 있었습니다만."

 아오미네라 불린 청년은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고선 머리를 긁적였다. 일어나 있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라고. 깜짝 놀랐잖냐. 투덜거리는건지 그냥 해보는 말인지 툭 내뱉고는 그대로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는 그에게 테츠, 쿠로코 테츠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못 알아차리는 아오미네 군이 문제입니다. 조금 더 제게 주의를 기울여보세요. 마치 어린아이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 같은 말투에 아오미네는 대충 대답하고 그대로 탁자에 엎어져 버렸지만. 그렇게 엎어져 있노라니 어렴풋하던 커피향이 확실하게 났다. 몸을 어기적어기적 일으켜 아까 쿠로코가 올려놓은 것을 확인해보면, 거기엔 커피가 담긴 작은 찻잔이 있었다. 커피향의 정체는 이것이었나보다. 괜히 일하다 졸아서 엉망으로 만들지말고 정신 차려서 하는게 좋습니다. 그렇게 덧붙이는 목소리도 들렸다. 이러면 반쯤 불가항력으로 이제 그만 두고 자야지, 했던 마음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밤 중에 일한다고 커피까지 타줬는제 이제 잘거였다고 했다간 또 크게 한 소리 들을게 뻔했다. 그건 싫으니까 말이지.

 "어이, 테츠……?"

 그래도 일단은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둘까 싶어 그를 부르던 아오미네는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까지 옆에 서있던 그는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서재를 뒤적여 책 몇 권을 들고 뒷편의 소파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왜 자지 않는가는 둘째치고 무슨 책을 그렇게 들고 온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이렇게 밤까지해서라도 끝내지 않으면 안 되는 바쁜 일이 있다고 했던 기억은 없었고, 그가 가져온 책들 또한 자세히 보니 하나같이 전부 '어린이를 위한 동화' 따위의 것들이었다. 정작 급한 제 서류따위는 잊도 그의 행동을 빤히 관찰하고 있는 아오미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쿠로코는 덤덤하게 가져온 책들 줄에 아무거나 한 권을 골라 첫 장을 펼쳤다. 말 그대로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귀여운 일러스트들과 커다란 글자들이 인쇄되어 있는 페이지였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 잠깐 눈으로 글자를 읽는듯 하더니 이내 한 글자씩 천천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읽어가는 그를 아오미네는 혼란스럽다는 눈길로 힐끗 쳐다보았다.그의 표정은, 늘 잘 변하지 않는 그런 무표정이 아닌 상냥해보이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여전히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지 혼자서 페이지를 넘기며 계속 이야기를 소리내어 읽어나가는 그를 멍하니 지켜보던 아오미네는 문득 제 앞에 아직도 그대로 놓여있는 서류들을 떠올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그의 행동이 신경쓰이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안 자고 뭐하냐. 얼른 자라."
 "아오미네 군이 아직 일하고 있는데 혼자 잘 수는 없죠. 저도 일이나 할까 하고."
 "일? 그게 무슨 일인데?"
 "아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주는 연습입니다. 꽤 좋아하거든요."

 본인이 그렇다고 말하는데 더 뭐라고 할 수 없어 아오미네는 다시 제 서류쪽으로 눈을 돌렸다. 바꿔서 말하자면 지금 자신이 일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도 일부러 안 자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제가 일을 끝내면 그도 책을 읽는 것을 멈추고 자러 갈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고 서류를 집어들었다. 지금까지 끝낸 것은 절반 남짓. 아직도 한 만큼은 더 해야한다는거지만, 지금까지처럼 적단히 게으름 피우면서 쉬엄쉬엄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에게 미안하기도하고. 하지만 이건 빨리 끝내야지 마음 먹는다고 해서 생각한만큼 그리 빨리 끝나주는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억지로 아닌척 하고 있지만 그의 목소리가 굉장히 신경쓰였다. 그런가, 늘 저런 목소리로 조그만 아이들한테 책을 읽어주는건다. 보육사가 하는 일이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한다고 하면 하나같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신경쓰지 않을 요량으로 눈을 크게 뜨고 서류만 쳐다보기도 하고, 일부러 소리내어 커피를 마셔보기도 하고, 여러모로 노력해봤지만 항상 정신차려보면 어느새 제 일보다 그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아도 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에 방해되니까 가서 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아오미네 다이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서류를 집어들었다. 벌써 같은 서류를 집었다 놨다만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무슨 사건이 이렇게 많이 일어나서 그런거냐고 괜한데 화풀이도 해보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는 와중에도 쿠로코가 읽는 책은 계속해서 바뀌어나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아오미네가 당연히 내 옆에 있는 녀석이 아니냐고 속으로 대답하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설공주는 마녀가 준 독사과를…… 늑대가…… 아기돼지 삼형제는……, ……는 거품이 되어……. 결국엔 하던 일을 반쯤 포기하고 쿠로코가 읽어주는 동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아오미네는 순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를 흉내내기라도 하는건지 발소리를 죽이고 그의 뒤로 다가가 무방비한 어깨에 턱을 폭 묻으며 물었다.

 "인어공주 이야기는 분명 해피엔딩이 아니었던가?"

 아오미네의 물음에 읽던 것을 멈춘 쿠로코는 조용히 책을 덮었다. 갑자기 다가온 그에게 놀란 기색도 없었고, 어느새 표정도 책을 읽을 때와 달리 평소의 그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척이나 슬픈 이야기죠."
"……."

 인어공주는 거품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그가 읽었던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 번 속으로 되뇌이고 아오미네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따라 같이 움직이는 쿠로코의 눈동자를 보고는 소파에 손을 짚고 기대어서서 시선을 다른데로 돌렸다. 왕자라는 그 놈이 나쁜 놈이네, 그렇데 헌신적인 인어공주를 잊다니. 그러네요. 왕자가 나빴어요. 인어공주도 말야, 그런 놈이 대체 어디가 좋다고……. 잦아든 아오미네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묘하게 무거운 공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입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옛날, 어딘가의 이야기도 비슷했죠. 맹목적으로 쫓았던 누군가를 버렸던……."
"버린게 아니라 떨어뜨린거다."
"……확실히 아오미네 군은 뭐든지 잘 떨어뜨리고 다니긴 하지만."

 그것은 어딘가 약간 핀트가 어긋난 것 같은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원망하는 목소리였던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꺼낸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인어공주 이야기와 닮아 있었기때문에? 애초부터 왜 하필 마지막에 읽었던 게 인어공주 이야기였지? 뭐라 반응해야할지 고민하는 아오미네와 달리 쿠로코는 아무렇지도 않은 눈길로 읽고서 옆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시 서재에 꽂아넣으려 갈 생각인지 일어나려는 쿠로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서 아오미네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서 우리 공주님은 이 왕자님의 굿나잇 키스가 없어서 불안했구나?"

 다시 책을 가져다두러 가겠다며 손목을 놔달라고 말하는 쿠로코에 아오미에는 잠시 생각하는듯 눈가를 찌푸렸다. 대체 왜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답하는거냐고. 장난이잖아. 아오미네가 놔주지 않자 쿠로코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놔주세요. 그는 가끔 이런 말투를 사용했었다. 화내고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만큼 작고 나긋나긋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단호한 말투. 언제 또 이런 말투를 들었더라? 같이 살자고 했었을 때? 아니, 아니다. 좀 더 오래 전. 고등학생일 때였던가. 그만큼의 차이로 있던 시합에서 포기하는 건 죽어도 싫다고 말했을 때. 너와 내가 서로 다른 학교에서 적대하고 있었던……. 아직 어렸을 적의 일을 생각해내고나서 쿠로코의 표정을 다시 살펴본 아오미네는 그의 표정 또한 그때와 닮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인어공주는 거품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그제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그렇게 인어공주 이야기에 집중했던 이유, 하필이면 그 이야기 이후에 묘하게 태도가 바뀌었던 것도. 그는 그 이야기와 자신을 겹쳐보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림자는 또 다시 빛에게 버림받을까봐, 그것이 두려운거다. 고등학생이었던 그 때처럼. 바보같이. 누가 누구에게 바보라는거냐. 결국엔 너도 똑같잖아.

 "……안 버려."

 너라는 그림자에게는 나라는 빛이 필요하니까. 그의 손목을 놔주는 것 대신 아오미네는 그대로 잡아당기는 쪽을 택했다. 체격이나 힘의 차이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그는 손을 억지로 뿌리칠 새도 없이 확 끌려왔다. 굳이 길게 말을 해가며 설명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가 뭔가 말하여 하기 전에 아오미네 다이키는 고개를 숙여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눈꺼풀에도, 콧등에도, 입가에도, 차례차례 내려와서는 입술까지. 벗어나려 힘을 주고 있던 그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은 듯한 흐트러진 숨결이 가까웠다.

 "……정말이지, 어린 늑대 한 마리를 키우는 것도 정말 힘드네요."
 "어려도 늑대는 늑대다, 테츠. 시험해볼래?"
 "좋아요. 어디 한 번 시험해보도록 하죠, 아오미네 군."

 ……물거품이 되려 했던 인어공주는 공기의 요정이 되어 다시 공중으로 떠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모두에게 잊혀진 결말.





IF세계 기반 경찰 아오미네x보육사 쿠로코
2012.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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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시즈] 迷子のココロ

2016. 1. 12. 01:02 | Posted by 에클레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란게 정말 있을까. 가끔 그런 의문을 갖곤 했다. 어쩌면 평소에 하늘을 올려다 본 적이 얼마 없어서 못 본 걸지도 몰랐다. 사람이 항상 하늘을 보며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을 하다보면 그런 여유는 자연스레 사라지기 마련이니 누구의 탓을 할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 그냥 문득 떠오른 의문이고, 바람이었다. 그런 날이 있다면 한 번쯤은 보고싶네ㅡ 하는. 그리고 우연히 그런 생각이 들어 하늘을 보고나서 깨달은 것은, 오늘이 마침 그런 날이었다는거다.



* * *



 집안은 밝았다. 불은 하나도 켜놓지 않았지만 켜놓은 것 마냥 밝았다. 낮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밝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여름의 끝자락, 보고싶었던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렇구나, 정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라는게 있기는 하구나. 신기하게도 그 외의 감상은 없었다. 더 보고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돌아왔다. 그게 전부인 이야기였다. 왠지 기운 빠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니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다.

 조용하다는 단어 외에 지금 상황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을것 같았다. 넓은 집에 사람이라곤 한 사람 밖에 없고, 티비나 라디오를 켜놓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아무 말 않고 마냥 창밖을 내려다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조용하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어딘가 이상한거다. 사실 조용한 집 안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자 사는 집이 아니고, 사는 층은 다르지만서도 여기저기 반쯤 얹혀사는 듯한 것들도 있다. 늘 원하지 않았는데도 시끄러운 공간이었는데. 적응되지 않는 침묵을 깨고싶었는지 청년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잠깐 났던 그 소리가 더 조용한 집 안을 강조하는 꼴이 되었지만. 무엇을 하는게 좋을까 같은 생각을 하는건 아니지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이 차분하게 눈을 감았다. 누가 보면 이렇게 차분하게 있을 수도 있냐며 놀라겠지. 차라리 놀랄 사람이 옆에 있어주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눈을 뜬 것은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창문을 닫아놔서 바람이 불 리가 없는데, 마치 누가 옆에서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눈가를 움찔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기분탓인가 보다. 괜히 길게 숨을 내뱉고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지간히 할게 없었던 모양이었다.

 제 머릿결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에 속했다. 늘 염색한 금발을 유지하고 다니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이렇게 할 일 없이 앉아있노라면 옆에 앉아선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별 상관은 없었지만 거슬려서 거친 머릿결이 뭐가 좋다고 만지작대는거냐고 물었더니, 그냥이라고 답했다. 난 이 감촉이 좋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떼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 좋을대로 하라고 하긴했었지만. 그런데 네놈은……. 어? 뭔가 말했어? ……아니다.

 그에게는 늘 특이한 향이 났다. 키차이때문인지 이렇게 나란히 앉아있으면 특히 더. 뭔가 특이한 샴푸라도 쓰는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딱히 나쁜 향은 아니었다. 굳이 평하자면……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하기 때문인지 머릿결도 좋았다. 가끔 화가 나서 쥐어뜯을듯이 휘어잡았다가 새삼스레 느끼곤 하는 사항이었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그런 자기 머리카락을 놔두고 굳이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 한두번인가. 사소한 것까지 생각했다간 짜증만 날게 뻔했다. 이렇게 자꾸 말하니까 싫은 행동인것 같아 보일지도 몰라서 다시 말해두지만 그건 아니다.

 난 말야, 이 느낌이 정말 좋아. 짐승의 털을 만지는 느낌도 나긴 하지만 뭐, 그런거 아니겠어? 시즈는 짐승이니까. ……따위의 말을 꼭 한 번씩 덧붙여선 사람을 화나게 하는것만 아니라면.

 그런 생각이 나서 제 머리카락을 한번 만져보았지만 역시 그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뭐가 좋다는거지? 그냥 하는 말인가? 다음에 만날때는 꼭 물어봐야 궁금증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런 의문만 하나 늘었을 뿐, 그 외에는 전혀 얻은 것 없이 청년은 손을 떼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불편하지도 않지만 편하지도 않는 미묘한 느낌이다. 평소에는 안 그랬던것 같은데. 집에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원래부터 이렇게 컸던건가? 별거 아닌것 같았는데 늘 있던 사람의 빈자리라는건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하루이틀이야 워낙 바쁘니까 하고 넘어갔었는데, 오랜 시간 부재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잠이 안 올지도 모른다. 아직 밤이 되려면 한참 남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다.


 그러니까 그 녀석 생각을 하는게 아니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놈의 생각같은 건.

 쳐다본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떠다니는 구름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그 녀석도 이런 하늘을 보고 있을까. 이런 식으로 계속 혼자 생각하느니 차라리 전화를 하는 쪽이 나을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니, 하늘 얘기는 핑계다. 한마디, 다 필요없으니까 빨리 돌아오기나 해.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2012.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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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이자]

2016. 1. 12. 01:00 | Posted by 에클레아

  어릴때 고양이를 키웠던 적이 있었어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나왔는지도 알 수 없었으며, 이 상황과 전혀 연관을 지을만한 것도 없었다. 그저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인 의미없는 말. 무심코 내뱉은 자신조차도 왜 그런 말을 했나 싶어 잠시 아무 말 않고 조용히 있었더니, 오히려 지금까지의 제 이야기에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던 상대가 먼저 왜 말을 하다마냐는 식으로 물어왔다. 그래서, 어땠습니까. 그의 말에 당황한 것은 자신쪽이었다. ……듣고 있었어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잖아요. 꼭 말을 해야하는 겁니까? ……아뇨, 됐어요.

  그다지 이런 쓸데없는 것으로 굳이 말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은 상대다. 키 차이가 나는 그를 올려다보고 한숨을 푹 쉬었더니 어린애가 벌써부터 한숨 쉬지 말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린애 아니에요, 몇 번을 말해도 도저히 들어주질 않는다. 그에 비하면 한참 어린애라는 것 정도는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괜히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냥, 늘 어린애 취급하며 제대로 봐주질 않는 그에 대한 오기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뿐이고,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옆에 던져져 있던 베개인지 쿠션인지 모를 것을 집어 끌어안았다. 푹신한 느낌에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고양이가 말이에요.

  한참 어릴적의 기억을 떠올려가며 말하다가, 나는 왜 고양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다고 한참 하던 말을 멈추면 그는 왜 멈추냐는 식으로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그렇다고 말하면서 그를 올려다봐도 전혀 흥미가 있다는 표정은 아니었다. 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얼른 이야기를 끝내던지 화제를 돌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시키나리는 말예요. 고양이같은건 키워본 적 없어요?"
"없습니다."

  예상하고 있었던 단답형이지만, 막상 현실로 돌아오니 애써 물어본 자신이 어쩐지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래, 이 남자를 상대로 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인가. 이렇게나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 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질문은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더 물어봤자 더 긴 대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 정도겠지. 이래서야 질문하는 사람도 재미가 없다. 전혀 배려라고는 없는 사람같으니.

"그럼 됐어요. 전 잘래요."

  더 말하고 싶은 마음도 뭣도 생기지 않아 그대로 풀썩 누워선 일부러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참을 그렇게 있어도 깨우려는 손길은 커녕 일어나라는 말 한 마디조차도 없다. 아, 됐어. 진짜 잘거니까! 나가던지 말던지 어디 가버리던지 알아서 하라 그래! 속으로 외치고는 안고 있던 것을 꼭 끌어안았다. 마음같아선 여기서 나가버리고 싶었다. 그래봤자 그는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 뻔한 결말에 헛웃음까지 난다. 처음부터 매달리는 것은 자신이었지 그가 아니었다. 당연한 진실을 이제와서 상기시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바보같기는. 오리하라 이자야, 이 멍청한 놈아.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놓고 이게 무슨 꼴이냐. 한없이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던 것은 낯익은 벨소리가 들려서였다. 시끄러운 타입의 벨소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잠결에 들었던 소리여서인지 굉장히 귀에 거슬렸다. 다행인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몸을 둥글게 말았을 때쯤 그 소리가 끊겼다는 것이지만. 뒤이어 누군가 통화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늘 같은 톤, 같은 목소리, 같은 말투. 언제나 그는 그랬다. 흐트러지는 일 없이, 변화하는 일 없이, 항상 그 자리에서 그대로. 분명 일 탓이겠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통화가 끊기고, 잠에서 깼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눈치 하나는 빠른 사람이다. 그렇게 자면 감기 걸립니다. 걱정인지, 그냥 예의상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그 말에는 대답하고 자는 척 했다. 그러면, 깬거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이 돌아온다.

"깨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신경도 안 쓰면서."

  더 자는 척하는 것도 귀찮아져, 벌떡 일어나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겨우 이 정도가 자신으로서 할 수 있는 반항의 전부라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안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들었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따분한 관계가 어디 또 있을까.

"그보다, 오늘은 왜 안 나갔어요? 아까 일때문에 전화 온 거잖아요."
"오리하라 씨가 일어나지 않은 덕분에."
"……무슨 의미예요?"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의 의미? 그래도 도저히 숨은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안 일어났는데 뭐? 아니 그보다, 그렇게 오래 잔건가? 대체 무슨 말이예요, 물어보려고 했으나 걸쳐뒀던 겉옷을 입곤 나갈 채비를 하는 그의 뒷모습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대체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지 싶어 무심코 시계를 쳐다봤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바빠요? 원래 묻고 싶었던 것은 이미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는지 전혀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계속 시간을 늦춰서 말이죠. 마침 아슬아슬하던 참이었습니다. 이번엔 더 늦출 수 없었으니까요. ……. 그럼, 깨우면 되는 거였잖아요.

  그에 대한 대답은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항상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열쇠를 챙기는 것을 봐서는 아무래도 오늘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예정인 것 같았다. 왜. 왜 신경써주는 척 해요. 차라리 한결같이 신경쓰지 않으면 되잖아요. 이런 식으로 하니까 늘……. 하지만 그 말은 소리로 나오지 않았고,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린 문이 닫히는 소리에 가려 사라져버렸다.

  오늘따라 혼자 남은 집 안이 넓게 느껴졌다.




2012.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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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시즈] 흔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

2016. 1. 12. 00:50 | Posted by 에클레아


"어쩐 일이야? 네가 먼저 나가자는 소리를 다 하고."

 일이 많은지 서류를 몇 겹인가 옆에 쌓아두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데에만 전념하고 있던 검은머리의 청년은 의외라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고개를 들었다.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웬만해서는 그도 건드리는 일은 없었다. 아무래도 일이 일이다 보니까 방해가 될 행동은 최대한 피한다. 그것이 둘이 함께 집에 있을 때의 무언의 규칙같은 것. 그런데도 굳이 그쪽에서 먼저 나가자는 말을 꺼내올 정도면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니, 이런 일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있었더라. 분명 손에 꼽으라면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는 숫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유가 뭔지나 듣고싶은데. 청년은 반쯤 의미없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두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아까부터 동생이 나온다며 티비를 보고 있던게 아니었던가.

"……안 나와."
"뭐가?"

 설마, 동생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라던가 그런건 아니겠지. 그럴리는 없을것이다. 그런 것으로, 굳이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일부러 불러서 나가자고 하지는 않을터였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그 정도는 알고있다. 같이 산 것만 해도 얼마인데, 그 정도 파악도 못 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안 나온다는 말인가. 청년은 그가 하는 말의 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참 전부터 꼼짝 않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앉은 채로 너무 오래 있는 것도 별로 좋은건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일어서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을 할거라면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게 좋을 것 같아, 시즈. 청년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별로 불쾌한 기색은 아니었다. 제 쪽을 바라보며 묘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청년은 이내 그의 표정에 묘한 당혹감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고보니 티비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기 전에 미리 꺼둔걸까. 들리는 거라곤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컴퓨터의 소리 뿐이었다. 생각보다 컴퓨터 소리가 크다고 생각한 건 잠깐이었다.

"부순게 아니라, 저게, 멋대로 꺼진거라고…!"

 그는, 아무래도 변명을 하는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하고 있었다. 부순게 아니야? 멋대로 꺼졌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한숨을 쉬며 그의 변명을 좀 더 들어볼까 하던 찰나, 문득 하나가 떠올랐다. 아, 그런가. 요컨대 티비가 고장났다는 건가. 동생이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는 둘째치고, 티비를 보면서 모처럼의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티비가 꺼져버렸다. 그래서 그는 할 일이 없어졌고, 자신을 부른거다. 하지만 아무리 갑자기 심심해져버렸다고는 해도, 같이 나가자는 제안을 해 올 줄이야. 역시 사람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는 말이 진짜인가 보다. 티비 주제에 도움이 된다. 그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거였다. 그가 먼저 그렇게 말해준다면 굳이 가지 못 할 것도 없었다. 일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어차피 마무리 짓던 중이었기도 하고 말이지.

"알았어, 모처럼이니까 네 제안에 따르도록 할게. 가고싶은데라도 있어?"

 대답은 없었다. 대신 딱 한 번, 고개를 저었을 뿐이었다. 그럴줄 알았어. 청년은 당연히 예상했던 대답이었는지 별 다른 말 없이 의자에 걸쳐뒀던 털코트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컴퓨터는 잠시 꺼두도록 하자. 나갔다 올건데 굳이 켜놓고 나갈 이유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컴퓨터를 끄고 나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재 시각은 저녁때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은 모처럼의 외식인가. 자신 혼자만의 선택이라고는 하나, 딱히 그가 거절할 것 같지도 않았다. 싫다고 해봤자 그럼 안 나가도 되겠네, 라던가 네가 밥 할거야? 라고 물으면 아무 말도 못할게 뻔하다. 단순하기는.

"그럼 먹고싶은거라도 생각해 둬."

 아무리 그라고 해도 설마 이 시간에 밀키웨이라던가, 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물론 그쪽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난 제대로 된 저녁을 먹고 싶거든. 그건 저녁을 먹은 뒤에 가도 늦지 않다고, 시즈. 모처럼의 외출이라면 일찍 들어올 필요도 없다.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일은 돌아와서 하면 된다. 물론 자신은 조금 바빠지겠지만 시간이 없다면 하루 정도는 잠을 자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고……. 이왕 나가는거, 천천히 즐기다 오는 게 좋겠지.

"그런데 시즈, 지금 밖에 비가 오는 것 같은데. 괜찮겠어?"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물어봐 줬건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비가 오는걸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신경을 쓰는 타입도 아니다. 뭐, 아무래도 좋겠지. 딱히 외출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던 탓에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누가 먼저 제안을 했던 항상 앞장서는 것은 청년 쪽이었다. 그럼, 갈까. 그렇게 말하는 청년은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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