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6에 나왔던 녹적앤솔의 개인 파트입니다. 배경은 테이코.
체육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정리를 끝낸 후에 돌아가려 미도리마는 밖으로 나와서 체육관 내부의 불을 껐다. 보통 이런 건 주장의 일이겠지만, 아카시가 다른 일로 바쁠 때에는 가끔 부주장인 미도리마가 하기도 했다. 미도리마는 이것에 대해 어떠한 불만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오히려 먼저 스스로 하겠다고 나서는 날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아카시는 내 일이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고는 했지만. 어쨌든 오늘은 아카시가 감독에게 불려갔기 때문에 대신 정리를 했던 것인데, 타이밍 좋게도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순간 저 멀리서 이쪽으로 오던 사람을 발견했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정리가 끝나기 전에 와서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아카시는 사과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빨리 끝내고 온 건 아니겠지. 이야기는 제대로 한 것인가. 응. 아카시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와 감독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미도리마는 알 수 없었고, 알 생각도 없었기에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물어보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아카시는 먼저 말을 꺼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늘 그랬다. 아카시와 함께 하교를 하기 전에 빈 교실에 앉아서 장기를 두는 것은, 둘만의 무언의 룰 같은 것이 되어있었다. 딱히 누가 먼저라고 한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었다. 사실 장기라면 굳이 하교 시간이 아니라도,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두고는 했으나 어쩐지 조금 다른 느낌을 주고는 했다. 단순히 주위에 다른 학생들이 가득 해서 시끌시끌한 교실인가, 아니면 단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교실인가 하는 별 것도 아닌 차이에 불과한 걸지도 몰랐다. 그래도 미도리마는 이 시간이 훨씬 좋았다. 조용하니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다른 이유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번 시험은 어땠어? 중학 시절의 마지막 시험이었잖아."
자신의 차례가 끝나고 나서, 아카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미도리마는 장기판을 보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카시는 자신의 차례가 끝나서인지, 어느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언제나와 같은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미도리마는 괜히 고개를 숙여 다시 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평소와 같다는 것이다. 어떤 시험이라도, 인사를 다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
"그래? 미도리마다운 대답이네."
아카시는 작게 웃음소리를 흘렸다. 미도리마는 자신의 말을 하나 움직였을 뿐이었다. 네 차례라는 것이다, 아카시.
"오늘은 힘들겠는걸."
진심인지 장난인지, 아카시는 미도리마가 움직인 말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말을 옮기기 전에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을지 잠시 고민하는 듯 작게 소리를 내더니 손을 뻗었다. 이게 좋을까. 그러나 허공에 멈춘 손은 곧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자신의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하던 미도리마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답지 않게 신중하군, 아카시. 무슨 소리야? 나는 항상 신중했어.
"사실 이번 시험은 조금 어려워서 고생이었는데."
아카시는 잠시 아까의 화제로 말을 돌려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을 집어 움직이고는 미도리마를 바라보았다. 미도리마는 역시나, 하는 말과 함께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오미네나 키세가 말했으면 믿었을 테지만 그 말을 한 것이 아카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아카시의 그런 말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아마 그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들조차 장난도, 하고 웃어넘기겠지. 아카시는 그것을 믿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 것인지, 표정에 아까부터 계속 미소를 걸고 있는 채였다.
"아카시."
"응?"
자신의 차례를 진행하기는커녕 안경을 고쳐 쓰면서 미도리마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기대라도 하는 것 마냥 아카시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별로 기대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네가 그런 얼굴로 말해봤자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거, 어느 쪽의 이야기야?"
"둘 다."
"어라, 들켰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한 아카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그 말에 넘어갈 사람은 없다니까. 그에게 농담은 그쯤 해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 미도리마는 그가 움직인 말을 그제야 바라보면서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대체 뭐가 오늘은 힘들겠는걸, 이냐. 아니, 농담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심하다. 움직일 수 있는 말이 없다. 어느 것을 움직이든, 다음 차례에는 확실하게 질 것이 뻔했다. 미도리마는 말을 움직이려다 말고 손을 내려놓았다. 다 알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왜 그러냐고 묻는 아카시의 앞에 있는 말부터 하나하나 집어 들어 정리하면서 그는 짧게 대답했다. 졌다는 것이다.
장기를 둘 때, 미도리마는 아카시에게 먼저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는 했다. 장기에 한정해두었지만, 그 이유는 그 외의 일에 있어서 둘이 직접적으로 경쟁할 일은 딱히 없기 때문이라는 쪽이 맞았다. 물론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가령 예를 들자면, 3년 내내 바뀌지 않는 둘의 등수라던가. 이것은 절대 미도리마가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아카시가 미도리마보다 조금 더 뛰어나기 때문인 결과였다. 그리고 미도리마는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늘 어딘가에 있었으나 할 수 없었을 뿐이고.
이런 것에 비하면 장기는 조금 달랐다. 보통 이런 게임은 이기는 날이 있다면 지는 날도 있고, 공평하게 승패가 갈리는 게임일 텐데 어쩐지 아카시에게만은 그것이 늘 예외로 적용되었으니까. 게다가 이런 건 어디까지나 게임이다. 게임 하나에서도 인사를 다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런 것으로 복잡하게 따져갈 생각은 없었다. 게임은 휴식을 위한 것이고, 재미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진다면 패배는 깨끗하게 인정. 혹시라도 이긴다면. 그럴 일이 있을지 장담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긴다면, 그때는 기뻐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 언젠가, 네게 승리할 수 있다면.
둘이 함께 하는 하굣길 역시, 하교 전에 함께 장기를 두는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집의 방향이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지만, 갈라지는 길이 나오기 전까지는 나란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혼자 걷는 길보다는 둘이 같이 걷는 쪽이 더 나은 것은 당연하니까.
"평소보다 조금 늦었네, 오늘은."
교실에서 장기판을 정리하고 사물함에 넣은 뒤, 미도리마와 아카시는 함께 나와서 교실의 문을 잠갔다. 가방을 메고 나란히 복도를 걷다가, 문득 시간을 확인하고서 아카시는 중얼거렸다.
"당연한 것이다. 네가 감독과 이야기를 한 시간이 있으니."
"빨리 끝났다고 생각했거든."
설마 그렇게 오래 있었을 줄은 몰랐다며 어깨를 으쓱하던 아카시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그를 올려다봤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올려다보기에 높은 건 여전하다. 하지만 항상 느끼는 키 차이가 오늘따라 조금 더 커보였다. 메워지지 않는 그와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렇게 그를 계속 올려다보고 걸으면 목이 아플 것 같다고 판단한 아카시는 그를 힐끗 보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툭 말을 던졌다.
"그러고보니."
아카시는 뜸을 들이듯 말을 끊었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이 궁금했는지 이번에는 반대로 미도리마 쪽에서 아카시를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태여서 그런지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붉은색의 짧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자신을 기준으로 봤을 때, 조금 아래의 아카시. 실제로 신장을 재어본다면 그 수치가 결코 조금, 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키가 꽤 큰 편에 속하는 탓도 분명 있었다.
아카시는 가끔이기는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기도 하는 탓에, 미도리마는 조금 긴장한 눈치였다. 평소에는 늘 상식의 범위에서 말을 하고, 행동하는 주제에 가끔씩 왜 그러는지 미도리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면까지도 전부 아카시 세이쥬로 라는 사람의 한 면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면 되는 거라고는 해도. 하지만 미도리마의 걱정 어린 눈빛과는 달리, 아카시의 입에서 이어진 말은 평상시와 같은 극히 평범한 주제였다.
"고등학교는 정했어?"
아. 생각해보니, 벌써 그런 때가 와있었다. 여태까지는 시험기간인 탓에 반쯤 잊고 있어서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사항이지만 지금, 중학교 3학년의 마지막 시험이 끝난 이 시점. 이제 학교생활에서 남은 것 중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다. 방학이니 졸업이니 하는 것은 그냥 시간만 지나면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이고. 아카시의 시기에 딱 맞는 질문에 미도리마는 고개를 기울였다. 뭐가 있더라. 학교 이름이라면 여럿 들었다. 하지만 지금, 마음에 정해둔 학교는 있었던가?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아직 이라는 것이다. 감독이 추천해 준 학교라면 있지만."
다수의 일반 학생들은 집 근처를 선호하지 않을까. 미도리마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에게 중요한 건 단순히 집 근처에 있는 학교인가, 는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이것을 묻고 있는 아카시에게도, 곧 여러 학교의 사람들이 찾아 올 것이 뻔했다. 서로 자신의 학교에 와달라는 것이겠지. 자신에게는, 기적이라 불리는 그들에게는 적어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감독 또한 그런 것을 감안하고서 몇 개의 학교를 추천해주었고. 그래도 역시 벌써 결정 내리기에는 이르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생각을 해보는 쪽이 좋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
꽤 진지하게 생각해서 대답을 했던 미도리마와는 상반되게도, 아카시의 입에서 나온 것은 굉장히 간단한 대답이었다. 먼저 질문을 했던 아카시는 그냥 그렇게 되물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표정만 보고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도 없었다. 아카시는 대체 무엇을 알고 싶었던 것일까.
그저 아무런 이유없이 그게 묻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어떠한 특정한 학교의 이름이 대답에서 나오길 바랐을까?
어쩐지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하교하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중학생 시절의 마지막 시험은 대실패. 미도리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대실패라고 할까, 정확히는 3년 내내 같은 성적이었지만. 그래. 그것은 3년 내내 시험 성적으로 아카시에게 이기지 못 했다는 것을 뜻했다. 언제나 제일 위에 적혀있는 아카시 세이쥬로 라는 글자는, 한 번도 그 자리를 빼앗긴 적이 없었다. 이번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역시 마지막까지 인가. 미도리마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마지막 시험의 점수를 받고, 등수를 받고, 모두가 진학할 고등학교의 이야기나 졸업에 대한 이야기로 들떠있는 이 시기는 학교 전체가 붕 떠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디까지나 저것은 3학년에 한정되어 있는 이야기일 텐데도 이상하게 그랬다. 소란스러운 복도를 걷다가도, 이제 이 학교를 떠날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상기시켜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랬든 저랬든, 3년간 학교에도 정이 들었다는 것이리라.
"어라, 미도리맛치."
복도의 저 끝에서부터 걸어오는 낯익은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굳이 얼굴을 보지 않고 말투만 들어도 누군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그런 식으로 부르는 유일한 사람. 드물게도 주위에 여자애들을 끼고 오지 않은 키세는 먼저 반갑게 인사를 했다. 2학년 때나 지금이나, 주위의 상황들은 많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도리마를 대하는 키세의 태도는 그다지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미도리맛치 반은 벌써 냈어요?"
"무엇을, 이라는 거다. 앞도 뒤도 없는 질문이군, 키세."
"아, 그런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자각하지 못 했을 게 뻔한 표정으로 키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아. 자주 보던 행동이었는데도 미도리마는 작게 한숨을 쉬며 안경을 조금 올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질문이 무엇이었냐는 거다. 그새 다시 질문하는 것을 잊기라도 한 건지 웃고만 있는 키세에게 다시 물은 미도리마는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그거, 오늘의 행운 아이템인가 그거예요?"
"할 질문이 없다면 가보고 싶은데."
"아,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진학 희망서, 라고 할까. 그거."
자신이 받았던 종이에 대한 적당한 명칭을 찾지 못한 듯 키세는 뒤를 얼버무리면서 대답했다. 진학하고 싶은 고등학교를 적어서 내는 조사서를 이야기 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걸 냈던가. 아직 낸 기억은 없었다.
"사실 우리는 조금 다르잖아요."
뭐가 다르다는 거지. 그렇게 물으려다 미도리마는 멈칫했다. 그리고는 그냥 말로 꺼내지 않는 쪽을 택했다. 원하면 무조건 그 쪽에 갈 수 있다는 뜻인가. 그거야 그 학교에서 원하기 때문이겠지. 그의 말대로 다른 건 사실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시험을 봐야하는 것이 정상이니까.
"미도리맛치는 정했어요?"
"너는 정했냐는 것이다."
"응. 여러 군데에서 오라고 했지만…… 역시 카이조 쪽이 좋을 것 같아서."
"그런가."
굳이 어디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학교 이름까지 말해주는 것이 키세답다면 키세다운 대답이었다. 미도리마는 작게 끄덕였다. 쿠로콧치는 어디에 가는 걸까요? 이어진 키세의 질문에는 그저 고개를 살살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할 말이 그게 끝이면 나는 가보겠다는 것이다. 앗, 잠깐만요. 미도리맛치!
쿠로코. 교실에 돌아온 미도리마는 키세가 말한 이름을 잠시 되새기면서 눈을 감았다. 곧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다시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키세는 쿠로코를 잘 따랐으니까 궁금해 하는 것이겠지. 그게 아니라도 금방 자신에게 물은 것처럼 모두에게 묻고 다닐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적어도 농구부에서, 그걸 아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별로 궁금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디에 가는가, 인가……."
혼자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소란스러운 교실의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책상 위에는 금방 키세가 말한 종이가 올려져 있었다. 미도리마에게도 오라고 권유한 학교는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 마음에 든 학교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정해도 괜찮은 걸까? 이상하게도 자꾸 한 질문이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있었다. 과연 그 학교에 가도. 이렇게 정해버려도.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라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 역시 있었다. 무엇이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걸까. 무엇이.
"미도리마, 들었어."
아카시는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무엇을 들었냐고 물으려다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웃을 뿐이었다. 놀리는 것인가? 아니, 전혀 아니야.
"슈토쿠로 결정했다며?"
"……!"
아카시의 물음에 미도리마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고 말하고 싶은 표정 같았다. 그것 역시 아카시는 예상했다는 듯 후후 소리 내어 웃었다. 미도리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권유를 받은 학교들 중에서도 마음에 들었던 곳, 그리고 과연 그걸로 간단하게 정해버려도 괜찮을까 고민했던 곳. 아카시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떤 루트로든 아카시의 귀에는 들어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는데.
"슈토쿠…… 도쿄의 3왕자인가. 네게 어울리는 학교네, 미도리마."
내게 어울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호칭은 아카시에게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카시가 자신보다 왕자니 뭐니 하는 호칭에 어울린다고. 미도리마는 움찔거리며 아카시를 바라보았다. 한 번 당황함을 내비친 표정은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키세라면 간단하게 가면을 쓰듯 동요 같은 건 감춰버릴 텐데. 한순간이었지만 키세의 능력이 부러워졌다.
뭐가 이렇게 불안한 걸까. 왜 이렇게 그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없는 걸까. 왜,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인지, 어째서 그에게서 그 이름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것을 잘 모르겠다. 계속 고민하고 있던 것과 같은 이유? 그것을 깨달았던 건 아카시의 다음 말이 나왔을 때였다.
"나도, 미도리마와 같이 슈토쿠로 갈까."
아카시의 말은, 반쯤 장난 같았지만. 그 반을 장난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진심을 담은 것 같았다. 미도리마는 그렇게 생각했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미도리마는 진심으로 그것이 진심이길 바랐다. 고민의 원인, 어쩌면 혼자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피했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의 마음에는 조금 덜 차는 곳이라도 아카시와 같은 곳이라면 그것도 좋다고, 그런 생각이 마음 속 어딘가에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계속 혼자 결정해버려도 좋은가, 라고 생각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이 납득이 되었다.
미도리마와 같은 곳으로 갈까. 그가 먼저 그것을 말해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꺼낼 생각도, 용기도 없었다. 아카시, 너는 또 내가 생각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군.
네 말이 진심이라면. 네가 정말 이 곳을 골라준다면.
그래서, 다음 3년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의 말을 듣고서 느낀 것은, 기대에 가까웠다.
방학이 다가오면 학생들은 들뜨는 법이다. 앞에도 말했듯이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은 3학년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일단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학년이나 학교를 불문하고, 모든 학생들에게 즐거운 사항인 것은 틀림없었다. 물론 즐거운 방학, 마냥 놀지 못하고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하는 학생들이 더 많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한 시험 같은 것이 예외인 몇 그룹에 속하는 미도리마는 방학을 조금 앞두고 가려고 생각해 둔 학교의 이름을 다시 적어서 제출했다. 학생들이 어느 학교를 가는지 파악하기 위한 학교 측의 마지막 설문 비슷한, 그런 것이었다. 예전에 제출한 것과 변동사항이 없다고 해도 내달라고 했고, 그저 학교 이름을 적어서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간단하게 적어서 냈다. 물론 학교 측에서는 미도리마를 포함한 기적의 세대들이 어느 학교로 진학할지 꽤 관심을 모으고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그런 것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슈토쿠秀徳 고교.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했고, 꽤 마음에 들기도 한 학교다. 농구로는 유명한 학교. 그리고 아카시가 고려해보겠다고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카시의 최종 결정은 아직 모른다. 과연 이것을 물어보러 가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을 하던 미도리마는 아카시의 반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아카시가 슈토쿠를 선택했을 거라고 반쯤 확신해 버려서, 조금 들떠 있었던 것도 같다.
아카시의 교실은 미도리마의 교실에서 별로 멀지 않았다. 같은 반은 아니지만, 한 학년에 그렇게 많은 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시끌시끌한 복도를 걸으면서 낯익은 얼굴들도 몇 명 지나쳤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카시는 교실에 없었다. 늘 함께 앉아서 장기를 두던 창가의 자리. 아카시의 자리에는 아무도 없는 빈 책상만이 있었다. 그의 교실은 소란스럽고,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의 자리가 텅 빈 것을 확인하니 어쩐지 교실 전체가 텅 비어버린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간에 교실에 없다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에게 불려 교무실에 갔을 수도 있고, 복도 어딘가를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고, 그 외의 장소에 있을 수도 있었다. 미도리마는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다시 움직였다.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도 자연스럽게 부실을 향해 걷고 있었다.
부실이라, 얼마만이지. 그러고 생각해보면 오랜 기간 동안 부실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쿠로코가 모습을 감춘 뒤부터였던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한 명 한 명 부실이나 체육관에 발길을 끊기 시작했다. 그래도 부주장이라는 직책상 꽤 오래까지 남아 있었는데도 이렇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나머지는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중학교 3년의 대부분의 추억이 있는 장소일 텐데. 사실은 꼭 오늘이 아니라도,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은 다시 가보고 싶기는 했다.
자물쇠가 보이지 않았다. 원래라면 지금은 정규 수업 시간이기 때문에 부실에 누가 있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자유로이 올 수는 있었지만, 이런 시기에 누가 올 것인가. 부실 문이 당연히 늘 보던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겠지 생각하고 열쇠를 찾으려던 미도리마는 문 앞에서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자물쇠가 없다는 건 누가 이 문을 열었다는 뜻이고, 그건 결국 이 안에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감독인가? 아니면 코치? 그들이 아무도 없는 부실에 올 일이 있을 리는 없다. 뭔가 놔두고 간 것이 있는 부원? 차라리 그 쪽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멋대로 추측하는 것을 관두고 미도리마는 직접 그 문을 열어보기로 했다. 그러면 추측하느라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게 가장 확실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낯익고, 당연했던 것이고, 몇 번이나 봤던 풍경이 새삼스럽게 보이는 기분은 묘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게 이런 건가. 오래 보지 않았더니 마음에서도 멀어져 버렸나보다.
문은 가볍게 열렸고, 눈앞에는 익숙했던 풍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익숙한 풍경에는, 익숙한 사람도 그림처럼 함께 녹아들어가 있었다.
"미도리마?"
그리고 그 사람은, 찾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아카시를 발견한 미도리마는 놀란 듯 그에게 왜 여기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는 미도리마야 말로 여기 왜 온 거야? 반박하듯 되묻는 아카시의 말에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 왜 왔는지는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다. 그냥 발길이 자연스럽게 이쪽으로 향한 것이었으니까.
"뭐, 됐어. 교실은 너무 시끄러워서. 조용히 있고 싶었거든."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해주고 아카시는 그가 늘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 앉았다. 여기는 조용해서 좋다고, 웃으며 말하더니 미도리마에게 자신의 옆 자리를 권유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었기에 순순히 그의 옆에 앉으며 미도리마는 물었다.
"뭘 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그냥."
애매한 대답을 하고 아카시는 기지개를 쭉 폈다. 딱히 한 일은 없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아카시의 대답을 이해한 듯 미도리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와 보는 부실, 둘 밖에 없어 조용한 공간. 그리고 찾고 있던 아카시까지. 다 좋았다. 단 하나, 아카시가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제외하면.
딱히 억지로 보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도 어느새 잊어버린 채였다. 아카시가 그 때, 그 종이를 떨어뜨리지만 않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아카시가 그것 떨어뜨린 것이 일부러였는지, 정말로 실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팔랑, 하고 종이가 바닥에 떨어져 옆에 앉아있던 미도리마는 그것을 주워 아카시에게 주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종이의 내용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아카시 세이쥬로. 그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라쿠잔洛山 고교. 그것은 낯선 학교의 이름이었다.
멋대로 했던 기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미도리마."
종이를 본 것을 알았는지, 아카시가 먼저 미도리마를 불렀다. 미도리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아카시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미도리마, 뭘 기대했던 거야. 기대가 깨졌다는 표정을 짓고 있잖아.
그 말대로다. 나는 아카시에게 대체 뭘 기대했던 거지? 미도리마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아무도 그것이 확정이라고 말해주지 않았는데, 왜 자신은 멋대로 그걸 확정짓고 멋대로 기대한 거지? 여태 생각했던 것이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아카시."
하지만 왜, 너는 그것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속으로만 그에게 묻고 싶었을 터인 말이, 자신도 모르게 말의 형태로 그에게 내어졌다. 왜. 왜 같은 곳을 선택해 주지 않았냐는 것이다. 아카시. 어째서. 그것은 전제가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그것을 느낄 틈은 없었다. 미도리마. 아카시는 한숨을 쉬었다.
"신타로."
순간 귀가 잘못 된 줄 알았다. 아카시가 부를 사람은 적어도 이 안에선 한 명 밖에 없는데.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름을 불러주는 건 아마도 처음. 지금까지는 쭉 성으로만 불러주었으니까.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 생소하게 들릴 수 있나 생각하며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 기분이다. 왜 갑자기 이름을 불러줬을까 같은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도리마를 보는 아카시의 눈빛은 단호했다. 네가 바랐던 것, 멋대로 기대했던 것. 그건 전부 네 어리광이야. 이제 그런 어리광은 통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하는 말은 장난이 아닌 진심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적이야."
그 말은 조금,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몇년 전 책이기도 하고... 극장판 기념으로 공개.
너무 오래 전에 써서 부끄럽습니다... 이거 썼을때가 완결 1년전쯤이군요...
원작에서도 이래저래 공개되지 않은 것도 있던 때니까 틀린 설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정도 감안하고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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