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냐고 한다면, 그래. 그날 밤부터였다. 윈터컵 결승에서 세이린에게 패배했던 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건 확실했다. 지고 나서 기분 좋은 사람이 있을 리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어떤 형태로 이용당하든, 아카시의 곁에 있으면 항상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깨진 순간이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형태로 나타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승리라는 것에 집착했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니고, 아카시 덕분에 이기면 그냥 그걸로 좋은 것이었다. 계속 이긴다는 건 꽤 기분 좋았으니까.
다른 걸 다 제쳐두고라도, 마유즈미 치히로는 아카시 세이쥬로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지면 큰일이 나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잠시 기분이 나쁠 뿐이다. 그냥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마유즈미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그렇게 승리에, 우승교라는 이름에, 그렇게나 집착했었던 것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 팀에 큰 애착도 없고.
마유즈미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앞에는 자신보다도 훨씬 큰 뱀이 있었다. 어째선지 그 날부터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꿈에 나타나고 있는.
처음에 저것을 봤을 때는 도망치려고 했었다. 당연하다. 사람보다 훨씬 큰 뱀이라니.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을 리가 없다. 저걸 보고도 태연할 사람은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는 아카시 세이쥬로 밖에 없었다. 아무튼 마유즈미 치히로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도망친다는 선택지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일단 최대한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공간인건지, 앞으로 걸어도 뛰어도 그것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꽤 앞으로 나갔을 테니 이제 괜찮겠지 싶었을 때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출구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문의 형상을 한 것도, 통로처럼 보이는 것도 없었다. 막혀 있는 공간 같지는 않은데도 그랬다. 어째서? 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유즈미는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많이 나타나곤 한다. 저 뱀도 마찬가지겠지만, 며칠 동안은 계속해서 출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꿈속에서 출구를 찾아 나오면 잠에서 깨게 되는 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마유즈미는 지금의 자신이 굉장히 성실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생기면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며칠간의 노력은 결국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처음에 의문을 가졌을 때부터 혹시나 하기는 했다. 설마 진짜일 줄이야. 나가는 곳, 도망갈 곳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쯤에 겨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할 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았다.
일주일 넘게 자신이 벗어나려 애썼던 그 커다란 뱀은, 자신을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움직여서 다가오는 것조차도. 마유즈미는 도망가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의미 없는 노력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같군. 1년까지는 되지 않은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마유즈미는 그 자리에 얌전히 서있는 것을 택했다.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자신은 무력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 외에는.
포기한 날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역시나 움직이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 사이에 마유즈미는 여태껏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는 못했던 그것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약간 붉은 빛이 도는 비늘이 섬뜩했다. 이 거리에서 확실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추측이 맞다면 양쪽 눈의 색이 달랐다.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공포감이 들었다. 벗어나고 싶다. 왜 이렇게 자신을 못 괴롭혀서 안달인 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그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겐 스트레스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저 뱀은. 물론 그걸 스스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나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어디론가 사라지고도 남았겠지.
그러고 보면, 자각몽이라는 게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이 꿈속인지 아닌지 자각하는 상태의. 그건 분명히 자기 마음대로 꿈을 움직일 수도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마유즈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 봤다. 저 뱀만 빼면 현실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마유즈미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데, 어째서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인가. 주위를 둘러보다가, 더 이상 뱀의 눈을 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착각인지, 뱀과 눈이 마주친 기분이었다.
아무튼, 그런 꿈을 계속 해서 꾸는 덕분에 잠을 깨서도 개운하다는 느낌은 요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자기 전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았다. 피곤하겠지. 정신적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닌데. 밖이 밝을 때는 그나마 나았지만 어두워지면 어김없이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기분이 들곤 했다. 차라리 잠을 안자는 게 지금 이 상태보다는 덜 피곤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점점 밤에 잠이 줄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몸이 위기를 느끼고 잠이 안 오게 되었다,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잠을 자지 않으려고 애썼다. 최대한 잠을 깨보려고 커피도 마셔보고, 마시면 잠이 안 온다는 고카페인 음료도 마셔봤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늘 비슷한 시간에 자던 사람이 갑자기 그런다고 생활 패턴이 쉽게 바뀔 리가 없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뱀과 눈이 마주치고 깨어나기를 여러 번이었다. 이게 더 고역이었다. 마유즈미는 점점 사람이 피폐해진다는 것이 이런 감각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디다 말할 곳도 없어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대체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매일같이 악몽을 꿔서 잠을 못 자겠다. 죽을 것 같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답이 올 것이 뻔했다. 그보다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하라니, 절대 못한다.
정신에 문제가 생겼나? 진지하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경기 한 번 졌다고 세상이 무너지나, 지구가 멸망하나. 아카시처럼 항상 이기기만 하다가 인생에서 처음 져봤다 같은, 그런 것도 아니고. 내 인생에 패배가 이것밖에 없다니 그런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데. 다른 원인을 찾아보려고 머리를 굴려도 봤지만, 최근의 일 중에서 짐작이 가는 건 그것뿐이었다. 딱 그 날부터 생긴 일이기도 하고. 그래서 일단은 그것 때문이 아닐까 원인을 추측하고 있는 거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이렇게 있자니 정말 정신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감각이었다.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한. 한숨도 자지 못했던 날에, 해가 뜨는 것을 지켜본 마유즈미는 좀비가 된 기분으로 학교에 갔다. 계속 제대로 잠도 못자고 자다가 깨다가만 반복해서 안 그래도 피로가 쌓일대로 쌓인 몸에, 아예 밤을 새버리니까 이러다간 정말로 쓰러져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학교까지 가는 도중에 눈앞이 빙글 돌았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농구부 은퇴식이 있다고 했는데. 마유즈미는 얼마 전에 들었던 일정을 잠시 떠올렸다가 바로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옥상에나 가자. 바람이라도 쐬고 정신 차리려는 생각에 책 한 권을 들고 늘 가던 곳으로 올라갔다. 기분 전환은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정신건강에 아주 중요하다. 그것을 최근 들어서 더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옥상에는 다행히도 아무도 없었다. 겨울이라 추울 줄 알았는데 적당하게 부는 바람에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계속 이렇게 있으면 조금 나아질까 했던 생각이 깨진 것은 옥상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 찾아오는 사람은 잘 없는데. 마유즈미가 굳이 이곳을 즐겨 찾는 이유 중에는 역시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가끔 누군가 오더라도 잠시 둘러보다가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던 마유즈미에게는 늘 방해였지만. 끼이익. 문 소리가 어느 정도 들리다가 멈추자 마유즈미는 누가 왔나부터 확인했다. 존재감이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그 누군가가 자신이 있다는 것을 보고 돌아가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 바람은 요만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유즈미 선배?”
“……이미 알고 있으면서 새삼스럽게 묻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여기 있을 거라는 것도 이미 예상하고 일부러 찾아왔으면서. 아카시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었다.
“아뇨,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독서.”
마유즈미는 손에 든 책을 흔들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종류의 책이었다. 아카시는 책을 보고 그런가요, 하고 답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취향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이런 건 도련님의 취향은 아니지, 어울리지도 않고. 아카시가 어느 라노베의 주인공이라고 하면 모를까. 속으로 생각하며 마유즈미는 가보라는 눈짓을 했다. 은퇴식도 끝났을 시간이고, 이제 농구부와는 연이 없는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니 아카시와 관련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을 압축한 몇 마디의 대화 후에 아카시는 수고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카시가 떠나고 잠시 뒤에 옥상에서 내려온 마유즈미는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람을 쐬고 나서 잠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정말로 일시적인 효과였거나. 그렇다고는 해도 조퇴는 역시 내키지 않았다. 차라리 학교에서 자는 게 낫지.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겨우 학교에서의 나머지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마유즈미는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언제 잠들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냥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거기서 기억이 끊겨있었다. 다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아침이었다.
시계가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유즈미는 그것이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창밖이 이상하게 밝았다. 해가 이렇게까지 늦게 지던가. 겨울인데 그럴 리가 없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오전 7시 13분. 오전? 시간과 같이 표시된 날짜도 자신이 아는 날짜의 다음 날을 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밤에 크게 할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진 덕분인지 몸은 한결 개운했다. 이제야 조금 살만했다. 기지개를 펴며 마유즈미는 어제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채인 가방을 뒤적거렸다. 뭔가 빠뜨린 것 같은데. 뭔가 두고 오기라도 한 건지 묘하게 뭔가 이상한 느낌에 가방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없는 건 없었다. 뭘까.
아. 어젯밤 꿈에 그 뱀이 나오지 않았다.
2015.07.12
라쿠잔온리 신간 샘플